새로운 냉전과 일본산업의 부활
새로운 냉전과 일본산업의 부활
  • 최아록 기자
  • 승인 2024.03.25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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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달러 환율은 1985년 플라자합의로 하락추세를 보인 이후 최근에야 1990년 이전의 환율인 150엔/1달러로 복귀하며 30여년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높은 환율에 따라 2023년 4분기 일본 Topix 500 기업들의 당기순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46% 증가하였다. 기업의 이익증가로 닛케이225 지수가 최근 사상 최고치인 40,000을 넘어서고 있어, 일본 주식시장도 1990년 버블붕괴 이후 처음으로 다시 활력을 찾고 있다. 일본기업들은 보유하고 있는 높은 기술력에 더해 최근의 이익증가와 주식시장 호황으로 투자여력과 도전정신을 다시 갖출 기세다.

냉전시대 자유주의 승리를 위한 교두보

2차대전 이후 전승국인 미국이 패전국에 보상금을 요구하지 않는 대신 자국의 화폐를 사용하여 자유교역을 하도록 한 브레튼우즈(Bretton Woods) 체제의 원래 의도는 전승국이 산업시설을 독점하는 대신 패전국에는 산업시설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를통해 승전국들은 자국 산업과 부를 늘리고 패전국의 재무장을 방지함과 동시에 자국산업생산품의 시장을 확보하고자 했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은 독일의 전쟁수행능력을 본원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산업생산능력을 무장해제시키는 모건소 플랜(Morgenthau Plan. 1944년 9월)을 검토했으며, 이를통해 대부분의 제조업을 금지하며 심지어 농축업 국가로 유지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에 서독이 넘어갈 것을 우려해 당시 미국대통령이었던 해리트루만은 허버트 후버를 특사로 보내 현실을 파악하도록 했으며 허버트 후버는 2천5백만 서독인을 농축산업만으로는 부양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는 제조업을 통한 산업생산능력을 보유해야 서독 규모의 면적에서 그 인구를 부양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서독규모의 인구부양에 필수적이었던 제조업 재생과 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한 수단은 1947년 알프레드 마샬의 마샬 플랜(Marshall Plan)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를 통해 미국은 1947년 7월부터 4년간 총 130억 달러(연간 32.5억 달러)를 유럽 각국(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총 16개 국가)에 지원하게 된다. 반면, 미국은 아시아는 냉전의 주요 전장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섬나라인 일본을 활용하면 태평양에 대한 통제권을 쉽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일본 내 정치적 안정과 그를 위한 최소한의 경제성장이 목표였다. 평화헌법을 통해 재무장을 저지하고, 적당한 원조를 하며 일본을 농수산업 국가 정도로 유지시킬 계획이었다. 

애치슨 선언(Acheson line declaration, 1950년 1월)으로 촉발된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로 아시아에서의 공산세력 저지를 본격화한 미국은 그 지원기지로 일본을 활용했으며, 한국전쟁으로 일본산업은 빠르게 재건되게 된다. 일본의1949년 수출은 5억 달러에 불과했으나, 1953년에는 46억 달러까지 급증했으며 여기에 미국의 군수물자 구입 24억 달러가 추가되었다. 연합국의 한국전쟁 참전에 따른 일본산업의 빠른 재건은 아시아에서 유럽에서의 마샬플랜과 같은 역할을 했다.

냉전초기 미국의 경제적 긴장감은 1954년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가 한 발언에서 잘 드러난다. “만약 생산기준을 향상시키고 있는 공산주의의 부단한 노력을 우리가 따라잡지 못한다면 대부분의 세계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와 같은 긴장감 하에 미국은 냉전초기 세계경제 속에서 서유럽, 일본 및 주변 국가의 위상을 새로 정립하려 했다. 미국은 과거 제국의 중심부였던 서유럽과 일본을 기존 식민지(원재료 조달 및 완제품판매를 위한 시장)였던 국가들을 통해 지탱하고, 서유럽과 일본을 교두보로 삼아 공산주의를 봉쇄하고자 했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과거 식민지 및 제3세계 국가를 자유시장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는데, 이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차관제공 및 원조를 통해진행됐다. 

이와 같이 2차대전 이후 미국의 대 국가 산업 및 무역정책은 냉전의 틀 하에서 활용되었다. 공산주의 지역과 체제경쟁을 하던 미국은 마샬플랜 등을 통해 서유럽 주요국에 생산설비를 갖추게 했으며, 아시아에서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일본에 생산설비를 갖추게 했다. 산업국가가 된 서유럽과 일본의 1970년대 고성장을 통해 미국은 소련과의 체제 경쟁에 있어 경제력에서 압도하게 된다.

1970년대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의 다수 국가가 자유시장 편입을 통해 성공적으로 경제성장을 한 것도 냉전의 승리에 기여했다.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브라질, 멕시코는 1970년대 들어 1980년까지 10년간 평균 7.5%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는데, 이는 제3세계의 타 공산주의 및 전체주의 정권의 집단주의적 경제발전 방식에 대한 의구심을 높였다. 여기에 더해 미국과 중국이 1979년 1월에 수교를 하고, 1980년대 들어 중국이 개혁, 개방정책으로 전환하면서 자유주의 진영으로 세력이 기울게 된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세력경쟁과 경제력에서 소련의 패색이 짙어지자 미국은 필요 이상으로 강해진 서유럽 및 일본의 힘을 누를 필요가 있었고, 1985년에는 플라자 합의를 통해 서유럽 및 일본의 환율을 조정해서 자유진영 주요국 수출경제의 성장을 약화시키기 시작했다. 이 때 소련의 경제는 이미 휘청거리고 있었고 1986년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1년 소련의 해체로 냉전은 종료되었다. 미국은 냉전의 주요 수단이었던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접점에 있던 우방국의 경제력 강화가 더 이상 필요 없어졌다. 1990년대 이후 미국은 대규모 무역적자 때문에 오히려 서유럽 및 일본의 수출경쟁력 약화가 필요했다. 그로부터 거의 30년간 서유럽과 일본은 미국의 지정학적 요충지로서의 주요 관리지역에서 그 중요성을 잃게 된다.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확장과 새로운 냉전

경쟁체제였던 공산주의가 와해된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와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는 독주했다. 냉전종식 직후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유명한 논문‘역사의 종언’에서 “자유주의는 20세기 전반에는 파시즘을 파괴했고, 20세기 후반에는 공산주의를 파괴했으며, 이제는 자유주의에 대항할 이데올로기는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후쿠야마는 “국가들은 더 이상 의미 있는 분쟁거리를 가지지 않게 되었으며, 강대국 간의 전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새로운 체제에서 당면하게 될 가장 큰 도전은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야기되는 무료함일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1980년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및 영국의 마거릿 대처 수상을 필두로 시장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했으며, 이데올로기의 승리와 함께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는 1990년대 이후 30년간 독주했다. 그 기간 동안 무역확대에 따라 국경이 없다고 할 정도로 경제의 국제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 미국은 가능한 한 많은 수의 국가를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전환시킴과 동시에 개방적 국제경제 체제를 조성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효과적인 국제기구들을 건설하는 데 집중했다. 세계 전체를 미국식 자유주의 시장경제 모델로 바꾸고자 했다. 그러면 핵확산 및 테러리즘을 완화하고 자유민주주의는 더욱 안전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멕시코, 브라질을 제외한 많은 곳에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확장은 실패했고 오히려 현지 민족주의 세력과 전체주의 체계를 공고화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또한, 그 과정에서 미국은 동부 유럽을 향한 북대서양조약기구의 확산, 중동지역에서의 여러 차례 전쟁 등 군사적인 방법에 의존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일부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보여지듯 치명적인 실패도 있었다. 실패가 이어지자 최근 미국은 자유주의 외교정책의 환상에서 서서히 깨어나고 있으며, 아프가니스탄의 철수는 그 대표적인 증거이다. 

한편, 미국은 1979년 중국과 수교 이후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민주화시켜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질서에 통합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는 새로운 냉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미국의 중국 포용은 중국에 시장가치를 인정하는 사회, 경제 체제와 일당 독재의 정치체제가 공존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 준 결과가 되었다. 그에 따라 다른 국가의 지도자들도 정치권력을 독점하는 동시에 자국경제를 재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결국 자유시장이 민주주의 국가뿐만이 아닌 공산주의 및 전체주의 국가의 경제까지도 강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중국이 2001년 WTO 가입 이후 무서운 경제성장을 보여 경제력에서 미국의 패권이 위협당할 상황에 놓이자, 2010년대 후반 이후 미국은 중국에 대한 견제를 본격화했다. 당시 미국의 위기감은 2018년 4월 미국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발표한 연설문에서 드러난다. “중국 공산당은 관세, 쿼터, 환율조작, 강제 기술이전, 지적재산권 도용, 보조금 등 자유공정무역에 어긋나는 정책을 사용해 왔습니다. 중국은 나머지 아시아 국가를 합친 것만큼 군사비를 지출하고 있으며, 미국의 군사적 이점 약화를 노리고 있습니다. 중국은 미국을 서태평양에서 밀어내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미국 기업, 영화 스튜디오, 대학, 싱크탱크, 학자, 언론인, 공무원들을 회유하거나 강압하며 미국의 민주주의에 간섭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새로운 냉전도 이제 본격화되고 있다. 최근에는 디커플링(de-coupling)이 아닌 디리스킹(de-risking)이란 표현을 쓰지만, 패권경쟁에 있어 어설픈 싸움은 없다. 세력 경쟁을 함에 있어 냉전시대에 공산권과 자유진영 간의 편가르기는 명확했으며, 원재료 및 시장확보를 통한 경제력강화 목적 등으로 제3세계에서도 세력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냉전시대에 미국측의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및 마샬플랜 등에 대응해서 소련측은 바르샤바조약기구, 코메콘(COMECON: 경제상호원조회의)과 같은 군사, 경제기구를 통해 연합하며 치열하게 세력다툼을 했다. 

전력을 다해 싸워야 되는 상황에서 미국은 제조업의 쇠락 등으로 노동자의 불만이 높아졌다. 그에 따라 자국 내 정치적 지지기반 확보가 해외 비핵심지역의 관여보다 더중요해진 상황이다. 또한, 금융위기 및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증가한 국가부채로 해외에서의 외교, 군사활동에 대한 금전적 제약은 커졌다. 미국은 늘어난 정부부채 규모를 감당하며 자국 내 정치적 지지를 유지하기 위해 과거 냉전시대와 같이 핵심지역에서 유럽과 일본이 가세해서 싸워주기를 바라고 있다. 다만, 이번에는 미국의 역할은 이전보다 더 줄이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새로운 냉전 하의 유럽전선이 드러나자, 미국은 유럽에 최소한의 지원만 하되 자체적으로 방어하도록 주문하고 있다. 미국이 아시아에서 제대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동원해야만 한다. 2차대전 직후 소련과의 냉전에서는 유럽이 주요 전장이었지만, 새로운 냉전에서는 상대가 중국인 만큼 동북아시아가 주요 전장이다.

냉전구도에 있어 일본의 중요성은 소련이 궁지에 몰리던 시절이었던 1983년 5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당시 서기장이었던 유리 안드로포프가 한 발언에서 알 수있다. “서방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추이를 살펴보건데, 현재 반소련 연합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매우 위험한 양상입니다. 우리는 일본과의 관계에서 타협을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전략적 가치가 없는 작은 섬(쿠릴 열도)을 함께 발전시키는 방안을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다른 제안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당시 일본 총리였던 나카소네 야스히로 입장에서는 미국과의 관계를 감안할 때 그 정도의 제안은 고려해 볼 필요도 없었다.

새로운 냉전시대를 맞는 일본산업의 현재

새로운 냉전을 맞은 현재 일본산업의 규모와 그에 대비한 한국산업의 위상을 알아보기위해 일본과 한국의 산업을 경합산업 위주로 간단히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2022년 한국의 GDP는 1조 6,740억 달러이고 일본의 GDP는 4조 2,320억 달러로, 일본이 한국의 2.5배이다. 참고하자면, 미국의 GDP는 25조 달러이고 중국의 GDP는 18조 달러이다. 주요 산업 중 한국이 일본에 비해 규모에서 우위에 있는 산업은 조선, 반도체 산업 정도이다. 철강, 정유 및 석유화학 산업에서 일본은 내수위주인 반면, 한국은 수출비중이 높아 동 산업에 있어 일본과 한국의 규모차이는 GDP격차 이하이다. 

그러나, 글로벌 시장이 형성되어 있고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자동차, 기계제품 및 부품 산업과 전자 제품 및 부품 산업에 있어 일본, 한국간 산업규모 차이는 GDP 규모 차이 이상으로 크다. 냉전 종료 이후 30여년간 잃어버린 세월을 보냈다고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세계 3위 수준의 경제대국이며, 기계, 전자 및 석유화학산업의 소재, 부품, 장비 생산에 있어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최근 엔화의 약세로 일본 수출기업의 수익성은 큰 폭으로 개선되고 있으며, 원화약세 보다 엔화약세가 더 강하게 나타나고 있어 한국기업 대비 일본기업의 수출가격 경쟁력은 회복되고 있다

다만, 일본의 무역수지는 2010년대 들어 적자로 전환된 이후 연도별로 부침을 보이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엔화약세에도 불구하고 수출확대를 통한 무역수지 개선은 과거와 달리 크지 않은 모습이다. 그러나, 이는 일본기업이 생산비용 절감, 현지시장 확보, 환리스크 축소 등을 위해 해외직접투자를 늘려 제조업의 해외생산 비율을 2011년 18%에서 2021년 26%까지 높였기 때문이다. 일본의 해외직접투자액은 2022년 기준으로 2조 달러를 상회하고 있으며, 그에 따른 소득수지 흑자만 30조엔을 초과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은 무역수지 부침에도 경상수지는 안정적인 흑자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해외보유 생산설비까지 감안할 경우 일본 제조업의 역량은 더욱 강력하다.

마치며

싸움에 임해서는, 그것이 전쟁이든 냉전이든 승리를 위한 전략적 우선순위가 자유시장주의 같은 사상보다 더 중요해진다. 미국은 냉전시대에 일본과 협조하며 공산주의 세력을 물리쳐 본 경험이 있으며, 일본 역시 정부 주도의 산업정책 수행에 있어서 탁월한 수완을 발휘한 바 있다. 1980년대 일본의 산업정책, 기업경영 관리기법, 제품개발 역량은 전세계 국가 및 기업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냉전시대 경쟁의 핵심은 군비경쟁에서 승리할 정도의 상대적으로 강한 경제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또한 군비경쟁의 핵심은 군사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첨단기술의 개발이며, 과거 냉전시대에도 핵전쟁 역량 확충 및 ICBM 등 우주전쟁 시대에 대비하는 기술까지 필요했고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새로운 냉전시대에도 군사적으로, 산업적으로 압도할 수 있는 첨단기술의 개발이 가장 중요하며 그에 필요한 기술 및 산업적 역량에 있어 미국, 중국을 제외한다면, 일본이 가장 강력하다.

자유시장 시대의 국제화가 저금리와 물가안정을 가져왔다면, 새로운 형태의 냉전에 따른 고관세와 공급망 재구축은 고금리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고 있다. 냉전 종료 이후 30여년간 이어진 평화 배당금의 시대는 끝났고, 중국 등의 세력과 맞서기 위한 미국, 유럽 및 일본의 지출증가는 제반 비용의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새로운 냉전 돌입에 따른 비용의 상승은 일본의 오랜 숙원이었던 디플레이션 탈출에 기여할 수 있다. 일본도 비용을 지불하겠지만, 새로운 냉전은 일본경제를 부활시킬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 일본 산업이 본격적으로 부활한다면 한국의 산업은 어떻게 될까?

[나이스신용평가 최우석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