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병희의 그림이 있는 풍경] 두물머리 자전거 풍경, 시간 속에서
[반병희의 그림이 있는 풍경] 두물머리 자전거 풍경, 시간 속에서
  • 반병희 고문
  • 승인 2023.11.27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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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자전거를 샀다. 5,6년쯤 된 중고다. ‘따르릉’에 가까운 생활형 하이브리드로 당근마켓에서 10만원을 줬다. 2,3만원이면 족한데 바가지를 썼다는 핀잔도 들었다. 바가지를 썼든 애호박을 썼든 내 자전거다. 온전히 내 것이 됐는데 몇 만원이 무슨 대수인가? 집, 승용차, 회원권 등 삼라만상 통틀어 내 명의로 된 것은 처음이다. 그동안 나름 ‘무소유’의 삶을 살 수 있던 것은 천성이 게으른 탓도 있지만, 물질에 대한 관리는 아내에게 맡기는 게 훨씬 속이 편하다는 내가 짜낸 꼼수 덕택이었다. 수십년을 입만 갖고 살아오다 비로소 ‘내 것’이라는 것이 생겼으니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는 집이 맨 윗층의 끝이라 복도에 세워놓기에도 그만이다. 재건축을 코앞에 둔, 50년 된 낡은아파트의 복도가 빛 난다. 아침 저녁 출퇴근때 한번씩 훑어보고 시간되면 핸들 안장 등을 쓰다듬기도 한다. 보기만 해도 흐뭇하고 뿌듯하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끌고 나간다. 반포대교에서 암사대교, 팔당대교까지 갔다 온다. 왕복하면 50여 km가 넘는다. 어쩌다 필이 꽂히면 아주 드물게는 옛날 경춘선 철로길을 타고 두물머리(양수리) 핫도그 집까지 갔다 오기도 한다.
중간 중간 쉼터에서는 또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주로 50대, 60대 ‘노땅’들이지만 이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어렵지 않게 얼굴을 튼다. 서로 말이 짧아지기도 하고 간혹 신안, 해남 어디가 동향으로 확인되는 순간 몇 단계를 바로 건너 뛰어 곧바로 호형호제단계로 진도를 뺀다. 이 세계에 처음 떨어진 이방인에게도 문호는 쉽게 열린다. 흔히 ‘자린이’이라고 불리는 ‘초자’들에게는 더욱 관대하다. 하늘같은 인자한 모습으로, 어떤 때는 영락없는 어버이 마음으로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가르쳐주려고 안달이다. 선험자로서 연륜에 바탕한 지혜와 우월함을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수신호는 왼손으로.’ ‘남이 당신을 추월하려고 하면 속도를 낮춰라.’ 라는 기본 에티켓에서 부터 ‘페달링을 잘 배워 둬야 속도도 잡고 균형도 잡는다.’ ‘무게중심은 코어를 기본으로 하라.’ 등 기술교육에 이르기까지 끝이 없다. 

수강생이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이면 강의는 무르익는다. 자전거에 얽힌 자신의 애환에서 철학에 이르기까지 역사는 간단없이 흐른다. “MTB를 알면 인생 다 깨우친 거여. 이 것 만큼 착실한 것도 없어. 비탈길, 자갈밭, 산등성이, 그래도 우리는 달려. 험하고 위험하지만 달리다 보면 끝은 있더라구. 우리네 인생길과 똑 같아. 그러니 이왕 타려면 로드가 아니라 처음부터 MTB를 타.”  분위기가 진지해지기라도 하면 “자전거를 움직이는 것은 두 허벅지야. 믿을 것은 결국 자신밖에 없어. 마누라? 자식? 내 나이 되면 식구도 다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나 혼자 왔다가 혼자 돌아가는 게 인생이야.”라고 오랫동안 고민했을 법한 속내를 자전거 타기에 빗대어 털어 놓는다.

한참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질 때도 종종 있다.
신소재 카본 프레임에 휠은 벨기에산이고, 바퀴는 67만원짜리 고탄성으로 갈아 끼웠으며, 속도계는 어떤 것을 장착했고. 브랜드 자랑, 장비 자랑이다. 이것 저것 다 합쳐 350만원, 1200만원, 1700만원, 심지어는 2400만원까지 가격대가 현란하다.
Specialized, Cannondale, Trek, Merida, Giant, Colnago, Pinarello, Bianchi, Cervelo, , Scott, Look, Cello, Elfama…

웬 놈의 브랜드가 이렇게 많은 지, 이 사람 저 사람으로부터 주워들은 것만도 이 정도니 실제 유통되는 제품은 얼마나 많을까?. 내 눈에는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데, 고수들은 가격과 성능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그 누구에게 양보할 수 없다는 듯 뿌듯함이 두 눈에서 철철 넘쳐나 양볼따구 끝까지 흘러내린다. 

그러니 쇠프레임에 10만원짜리 국산 중고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동정적 시선을 수도 없이 받았다. 나와 내 자전거의 출현 자체가 이들에게는 침묵의 ‘소란’을 일으켰다.
…대화에 끼워줄까? 말까?, 자전거로 인정해줄까? 말까?, 차림은 멀쩡한데 직장에서 쫒겨났나? 아내와 자식들로부터 버림받았나? 생김새는 멀쩡한데 어쩌다 저리 됐을까?...
싸구려 따르릉의 등장에 충격을 받은 쉽터는 순간 묘한 공기가 흐른다.
“그 고전(古典)를 타고 진짜 ‘아이유’고개를 진짜 넘어왔나요? 끌고 온 것은 아니고요? 정말 타고 고개를 넘었다면 대단한 일입니다. 독기(毒氣)를 인정합니다”는 감상평까지 나온다.

어린시절 우리 동네는 어정쩡했다. 행정구역상은 면(面)인데 생활무대는 읍(邑)이었다. 바로 뒷산이 읍과의 경계선이었다. 다니던 면소재지 초등학교까지는 10여리, 읍소재지 중학교까지는 20리 길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얕으막한 고개를 넘고 두서너 차례 실개울을 건너야 하는 그렇고 그런 평범한 시골길이었다. 중학교 등하굣길은 달랐다. 청주에서 충주를 잇는 큰 길(한길)이었다. 한길이라고 해야 2차선 폭에 자갈로 덮인, 지금과 비교하면 대단히 앤틱(antque)한 길로 소나기라도 내리면 한복판이 움푹움푹 패이는 비포장이었다. 플라타너스와 미류나무가 뒤섞여 길게 늘어선 가로수 만큼은 이국적 분위기가 물씬 풍겼지만, 시외버스와 트럭만이 이따금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느리게 지날 뿐, 행인이 거의 없는 단조롭고 지루한 길이었다. 게다가 나와 같은 중학교에 다니는 또래 애들이 우리 동네에는 거의 없어 등하굣길은 으레 혼자였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자전거를 타고 옆을 ‘휭’하고 지나가는 다른 동네 중학생들을 마주치면 얼마나 부러웠던지. 
 자전거 자체도 탐이 났지만, 이들이 나를 의식해 일부러 보여주는 묘기, 특히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또다른 손으로는 사과를 베어 물며 ‘쌩’하고 달려나가는 모습은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자전거 타기는 꼭 한번은 해보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 됐고, 삼중당과 삼성출판사의 세계문학 문고본 전집 다음으로 갖고 싶은 물건이 됐다.

애들은 통학 수단으로 사용하는데 그쳤지만, 만약 내 손에 자전거가 들어오면 간단한 짐을 꾸린 뒤 서울, 부산, 대구, 강화도, 속초, 울진 삼척, 광주, 지리산을 찾아 떠날 작정이었다. 왜인지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코스모스가 필 때가 되면 자전거를 타고 꼭 떠나겠다는 다짐을 수없이 했다. 나그네 길에 먹을 것이 떨어지면 남의 농사일을 도와줘 때우기로 했고, 잠자리가 없으면 들판의 볏짚을 이불삼아 덮은 채 하늘의 별을 헤아리다 잠들기로 했다.

그러나 자전거에 대한 ‘로망’은 로망으로 끝났다. 없는 집안 형편은 자전거를 살만한 여유가 없었고, 어머니는 그걸 그렇게 미안해했다. 그런 어머니를 보고 나는 더 이상 자전거에 대한 욕심을 내색할 수 없었다. 이러는 사이 중학생 시절은 ‘어?’하다 속절없이 지나갔고, 고등학생이 돼 청주로 나가면서 자전거는 일상의 우선순위에서 차츰 밀려났다. 대학, 군입대, 취업, 결혼, 해외파견 등 가진 것 없는 생활인으로 하루하루를 꾸려가기에 급급하다 보니 우연히 길가에서 자전거를 맞닥뜨려도 금속성 물질 이상도 이하도 아닌 물체에 지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별 감각이 없었다.

그런데 말이다. 희한하게도 나와는 한동안 관계가 없던 자전거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특별한 계기나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이 오십을 넘으면서 언제인지 특정할 수는 없으나 자전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강변을 산책하거나 달리던 도중, 달려나가는 로드바이크를 마주치면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기 시작했다. 뭐라 딱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빠르게 페달을 밟는 사람들을 보면 어디선가 많이 접한 ‘익숙함’이 느껴졌다. 무리를 지어 달리는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빨리 따라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자전거에 대한 의인화가 수시로 일어났다. 가슴 한 구석에서 작은 불덩이가 목구멍까지 타고 올라와 터지기도 했다.

희한한 감정은 또 일어났다. 이번에는 좀 색달랐다. 아무리 값비싼 외제 자전거라도 장만할 정도의 여유는 생겼는데도 막상 구입할 마음은 적극적으로 들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이것저것 알아볼 법도 한데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철인3종경기 출전 등으로 프로 경지에 오른 후배가 자전거 예찬 장광설을 늘어 놓아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런 나의 소극적 태도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굳이 찾아낸다면, 오래된 그 뭔가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싶은 막연함 때문이었다. 자전거를 사버리면, 그것도 삐까 번쩍한 로드바이크용 고급 자전거를 갖게 되면 소중한 비밀을 부숴 버리는 상실감이 클 것 같았다. 가질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절절했던 ‘동경’(憧憬)이 오랫동안 켜켜이 쌓여 화석화돼 내 몸의 일부가 됐음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가난한 촌놈 출신으로, 장학금이 아니면 대학을 다닐 수 없었던 촌놈에게 ‘자전거’는 자전거 이상이었다. 그 것은 나와 함께 가야 할 동반자이자 ‘희망’이었다. 대체할 수 없는 런닝 메이트이자 목표였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살아 넘겼다는 것은 그와 반비례해 내 안의 이상과 희망과 순수와 열정의 한 귀탱이를 갉아먹었다는 것을, 생존투쟁에서 페달링을 멈추면 나와 숨쉬기 조차 멈춰버린다는 냉혹한 현실을, 삶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것이기에 주저할 것도 슬퍼할 것도 없다는 사실을, 현실을 사는 것과 살아야 한다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심지어 가족조차 언제든 아주 가까운 남이 될 수 있음을, 이 모든 명제를 안을 수밖에 없는 오늘이 두려워 점점 왜소해지고 있음을 알아차리면서 나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때가 됐다. 비로소 자전거를 탐하기 시작했다. 그게 나이 50을 넘으면서였다. 물론 응어리졌던 것을 푸는 해방구는 아니었다. 마지막일 지도 모르는 그 무엇, 즉 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자전거를 인정했다. 

무엇에 의지해 자신을 해소한다는 게 그리 유쾌한 일상은 아니지만, 달리 방도도 없어 수시로 짧은 자전거 여행을 떠난다. 시간 너머 그 무엇이 손에 잡히는 것 같기도 하고, 지나온 초겨울 벌판이 가득차는 것을 보고 감격해하기도 한다. 외롭다고, 그립다고, 보고싶다고 넋두리하는 것조차 풍요롭게 생각될 때 낯선 카페를 찾아 든다. 혹시 겨울 무지개라도 뜰가 창밖으로 보내는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아까워서, 시간이 아까워서, 시간의 끝을 알기 시작했기 때문에. 정확한 지명은 알 수 없지만 경기도 양평 어디쯤에선가 빈들 길가에 섰을 때, 겨울강이, 겨울 하늘이 밤새 넓어졌음을 발견하곤 미친 놈처럼 한동안 목 놓아 울었다.
   
자전거에서 손을 떼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안다. 오늘 페달을 멈추고 손을 담갔던강물은 내일의 그물이 아님을 안다. 들판의 바람조차 잡을 수 없는 영혼임을 안다. 모든게 부럽지만 내가 아님을 안다. 나일 수도 없고, 그 또한 부질없는 짓임을. 그래서 나는 이번 주말도 자전거를 탄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곳을 향해. 나를 소진시키기 위해서.
 

필자소개
현 (주)SH내츄럴 회장
전 채널A 본부장
전 동아일보 부국장, 산업부장
전 아주경제신문부문대표 
전 에너지경제신문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