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다이어리] 31살 배우, 64세 평론가
[생각다이어리] 31살 배우, 64세 평론가
  • 신형범 칼럼리스트
  • 승인 2023.05.0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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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박은빈
배우 박은빈

대중문화 시상식이 끝나면 이런저런 뒷말이 나오는 건 이제 더 이상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참석자의 태도, 옷차림, 실수담 등이 에피소드로 소개되고 특히 수상소감과 관련한 평가는 예상 외의 파장을 일으키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얼마 전 있었던 59회 백상예술대상에도 뒷말이 나왔습니다.
한 평론가가 유튜브 채널에서 “울고불고 코 흘리면서…” “시상식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타인 앞에서 감정을 격발해선 안 된다” “품격이라는 게 있어야 한다.
열여덟 살도 아니고 서른 살이나 먹었으면 송혜교씨한테 배워라”라며 대상을 수상한 배우 박은빈의 태도를 비판했습니다. 

공인이라면 감정을 절제하고 자기컨트롤을 하는 게 성숙한 자세라는 논리입니다.
그 전에 “감사합니다”로 일관하는 천편일률적인 수상소감이 식상하다는 그의 비판에 동의하는 바가 있어 진짜로 그런가 하고 뒤늦게 해당 동영상을 찾아봤습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앓고 있는 우영우 변호사를 설득력 있게 연기한 박은빈은 수상소감을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죄송해요. 이런 순간이 올 줄 몰랐는데, 어린시절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대상을 받는 어른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후 약 8분 동안 이어진 소감에서 박은빈은 “우영우를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누군가에겐 큰 상처가 될 수 있겠다 싶어 많이 두려웠어요. 자폐인에 대해 스쳐가는 생각들이 혹시 편견에서 기인하는 것 아닌지 매순간 검증이 필요했어요.
또 ‘세상이 달라지는데 한몫 하겠다는 거창한 꿈은 없었지만 조금은 친절한 마음을 품게 되기를, 각자 다른 색깔들을 다채로움으로 인식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연기에 임했다’고도 했습니다. 

같이 일하는 동료, 스태프, 감독과 작가를 향한 고마움의 표현도 그저 예의를 갖추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 ‘아, 저 배우는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구나’라는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화려한 수식어나 명언으로 남을 만한 멋진 말은 없어도 훌륭했습니다. 

작품의 사회적 의미와 무게, 연기자로서의 부담감,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 생각, 감정, 그리고 가족에 대한 고마움을 조리 있게 말했습니다. 내가 보기에 훌륭함을 넘어 배우로서 인간적인 고뇌를 진솔하게 드러낸 이 수상소감은 어쩌면 역대 최고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

물론 전체 맥락을 보면 그 평론가는 박은빈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각종 시상식에서 수상자들이 다양하고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품격을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안타까운 마음에서 한 얘기라는 걸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타인의 감정까지 평가하고 지적질하는 건 무례하고 선을 넘는 일입니다. 눈에 ‘울고불고’만 보인 건 그의 식견이 딱 그 만큼밖에 안 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

오래 전, 아역배우로 출발한 박은빈에게 한 인터뷰어가 “어른들은 대체 왜 그럴까요?”라는 묻자 박은빈은 “아역배우의 삶에 대해 항상 무례한 질문을 하는 건 어른이고 필요 이상의 걱정을 하는 것도 어른이다.
나이 먹는다고 다 어른이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런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다잡는다. 지금 어린 친구들이 결코 어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세상에서 모든 걸 누리고 느끼고 있다. 그래서 웬만하면 조언하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1992년생(31살) 배우와 그보다 곱절도 넘게 산 1959년생(64세) 평론가 중에서 누가 더 성숙한 인격을 가졌을까요?

신형범 칼럼리스트
신형범 칼럼리스트
goodman@biztribune.co.kr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