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다이어리] 책장 구경
[생각다이어리] 책장 구경
  • 신형범 칼럼리스트
  • 승인 2022.12.16 05: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요즘은 동네 카페나 하다못해 카센터 대기실에도 책이 많습니다.서재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하고 책장 정도 규모입니다.
그 책들을 보면 카페나 카센터 주인의 취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전부터 나는 아는 사람의 집을 방문하게 되면 그 집 책장을 둘러보는 게 그렇게 재미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살아온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평소 잡담이나 시시껄렁한 농담만 주고받던 친구의 책장을 우연히 보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인상이 싹 바뀌는 경험을 했습니다.
꽂혀 있는 많은 책 가운데 읽은 흔적들을 보면서 내가 알던 가볍게 까불거리는 그의 모습은 희미해지고 중심이 단단한 한 자아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

반면 책 대신 장식품이나 트로피 같은 물건들로 채워진 책장도 있습니다.
어떤 방은 옷으로 가득 찼는데 책장은 헐렁했습니다.
휑한 책장은 텅 빈 책장 주인의 정신세계를 본 것 같아 더 이상 호기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 와중에도 거기 꽂힌 책들에서 문학 취향이나 사회적 의식이 엿보이면 그를 알고 싶어졌습니다. ​

세상에 상대하지 말아야 할 사람은 책을 딱 한 권만 읽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짜로 한 권만 읽은 삶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대학교수라도 전공서적 말고 다른 장르의 책이 없는 사람은 한 권만 읽은 사람입니다.
신앙이 매우 깊은 한 친구의 책장은 기독교 관련 서적만 꽂혀 있고 다른 책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도 한 권만 읽는 사람입니다. ​

기자 친구들이 많은데 이들의 책장은 대체로 산만한 편입니다.
자신이 골라서 취향대로 샀다기보다 출판사에서 보내오는 증정 받은 책들이 많기 때문에 책장 주인의 취향을 알기 어렵습니다.
책장에 신간이 주를 이루면 방금 무친 겉절이를 보는 느낌입니다. ​

나는 동네 도서관을 이용하면서 책장 욕심을 버린 지 오래됐습니다. 물론 안 좋은 점이 있습니다. 밑줄을 긋거나 접어서 표시를 할 수 없습니다.
독서는 의외로 휘발성이 강합니다. 저자로부터 흘러나오는 지혜와 감성의 양분을 오래 간직하지 못하는 건 물론 내가 느꼈던 감정조차 기억나지 않습니다.
읽는 것만큼 숙고하는 게 중요한 이유입니다. ​

역설적으로 궁극의 책장은 텅 빈 공간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를테면 사무엘 베케트나 이성복 시인, 김영민 교수의 서재엔 책이 몇 권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책장의 여백과 공간은 생각과 의미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많은 책을 잘근잘근 씹어 소화한 뒤에나 이를 수 있는 경지입니다.
이들은 읽고나서 하나 둘 책을 ‘제거’하는 대신 침묵과 여백 그리고 명상으로 채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