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다이어리] 통화 대신 문자
[생각다이어리] 통화 대신 문자
  • 신형범 칼럼리스트
  • 승인 2022.11.0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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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영화 《20세기 소녀》는 1990년대 말, 2000년 초반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물입니다.
사랑보다 우정이 중요한 17살 소녀 보라가 절친 연두의 첫사랑을 이뤄주기 위해 사랑의 메신저가 된다는 얘기입니다.
영화에서 삐삐와 그 단짝인 공중전화가 등장합니다. ​

다음 주 개봉을 앞둔 영화 《동감》은 2000년 김하늘 유지태가 주연한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입니다.
1999년을 사는 95학번 대학생 용(여진구)과 2022년을 사는 21학번 무늬(조이현)가 낡은 무전기로 소통하면서 20여년의 시간을 건너 특별한 감정을 쌓아가는 얘기입니다. ​

두 영화 모두 통신기기가 비중 있는 소품으로 등장합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통신기술의 발전은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순서로 보면 유선전화가 먼저 보급됐습니다. 그 전까지 꽤 유용한 매체였던 편지는 설 자리가 좁아졌습니다. 그러다 부재 중이라고 연락을 피할 수 없도록 삐삐라고 부르는 무선호출기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호출해 놓고 기다려야 하는 단점이 있습니다. ​

이후 호출의 번거로움을 없앤 이동전화가 보급됐습니다.
이제 아무 때나 어디서든 통화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음성만으로 성에 차지 않자 얼굴을 보며 통화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얼굴 뿐 아니라 전신을 옆에 불러내는 홀로그램 통화가 상용화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이렇게 쓰고 보니까 과학기술이 어떤 이유로든 연락을 피하려는 사람들을 완전히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겼습니다.
모두가 이동전화를 갖게 되자 통화를 예전보다 많이 안 하게 된 것입니다. 화상통화는 고사하고 음성통화까지 덜 합니다. 

통화보다 문자를 더 많이 합니다. 전체 소통 중에 문자가 50%를 넘었습니다.
연령대별로 또는 특정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통화 대비 문자 선호도는 80~90%에 달합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통화하기 전에 ‘잠시 통화 가능하세요?’ 같은 문자를 주고받는 게 당연한 절차가 됐습니다.
굳이 전화까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상대에 따라 나도 그렇게 합니다. ​

통화보다 문자를 선호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유를 주기 때문입니다. 문자에 언제 답할지는 나한테 달렸습니다.
답이 늦으면 상대는 내가 기분이 나쁜지 단순히 문자를 못 봤는지 바빠서 답할 시간이 없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당장 어쩌지 못합니다. 걸려오는 연락에 늘 무방비 상태인 우리에게 이런 비동시성과 불확실성이 그나마 숨 쉴 공간을 줍니다.
이런 자유가 편하다는 걸 경험했기 때문에 ‘통화 대신 문자’는 일종의 예절이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