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러시아의 우방국인 벨라루스에선 기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이 1949년 발표한 《1984》의 판매가 급증하면서 벨라루스 당국은 지난 5월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한 것입니다.
《1984》는 ‘빅브라더’라는 권력자가 등장해 미래 정보기술을 이용해 전 국민을 감시하는 전체주의 사회체제의 위험성을 경고한 디스토피아 소설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조지 오웰의 다른 작품 《나는 왜 쓰는가》를 다시 읽던 참이었는데 묘하게 시기가 맞아떨어졌습니다.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글을 쓰는 이유로 다섯 가지를 들었습니다.
이 중 ‘생계’ 때문에 쓰는 이유를 제외한 네 가지는 첫째, 순전한 이기심입니다.
똑똑해 보이고 싶고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또 사후에 기억되고 싶고 어린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하고 싶은 등등의 이유가 여기에 속합니다.
두 번째는 미학적 열정입니다.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을 말합니다.
세 번째는 역사적 충동.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 두려는 이유입니다.
글을 쓰는 마지막 이유로 오웰은 정치적 목적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정치적’이라는 말은 광범위한 이유로 사용됐습니다.
이 동기는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의도를 뜻합니다.당연히 이 다섯 가지가 글을 쓰는 이유로 정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오웰 자신에게는 역사적 충동과 정치적 목적이 가장 부합한다고 보여집니다. 여기에 다른 이유들도 조금씩 녹아 들어 결국에는 글을 쓰는 이유와 목적이 되는 것 아닐까요.
당연히 이 다섯 가지가 글을 쓰는 이유로 정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오웰 자신에게는 역사적 충동과 정치적 목적이 가장 부합한다고 보여집니다.
여기에 다른 이유들도 조금씩 녹아 들어 결국에는 글을 쓰는 이유와 목적이 되는 것 아닐까요.
여기서 재미있는 건 ‘생계’ 목적으로 글을 쓰게 되면 나머지 네 가지 목적과는 적정선에서 타협하게 되고 내용이나 표현의 강도를 절충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웰도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다'라며 정치적 목적의 글을 예술로 만드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밝혔습니다.
내 생각엔 그런 작품이 《1984》와 《동물농장》이 아닌가 합니다.
오웰이 밝힌 글을 쓰는 여섯 가지 원칙도 도움이 됩니다.
첫째 익히 봐 왔던 비유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둘째 짧은 단어를 쓸 수 있을 때는 절대 긴 단어를 쓰지 않는다 셋째 빼도 지장이 없는 단어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뺀다.
넷째 능동태를 쓸 수 있는데도 수동태를 쓰는 경우는 절대 없도록 한다.
다섯 째 외래어 과학용어 전문용어는 그에 대응하는 일상어가 있다면 절대 쓰지 않는다.
여섯 째 너무 황당한 표현을 하느니 이상의 원칙을 깬다.
이건 이오덕 선생의 《우리말 바로 쓰기》 〈문장론〉과도 비슷합니다.
우리말에는 수동태가 없지만 수동태가 흔한 영어가 모국어인 작가조차 수동태 사용에는 부정적이었습니다.
요즘 우리말이 고유한 정체성을 잃어가는 이유는 잘못된 서양어투나 문체에 오염된 영향이 큽니다.
이번에 나는 《나는 왜 쓰는가》를 근처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한 권 사 둬야겠습니다.
아무 때고, 어떤 페이지를 펼쳐도 읽을 게 있습니다.
또 아무 페이지를 봐도 글을 쓰는 이유가 다채롭습니다.
이오덕 선생도 글을 짓지 말고 삶 속에서 글을 낳게(쓰게) 하라고 하셨는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가들의 가르침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