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정치는 ‘무한게임’일까 ‘유한게임’일까
[시론] 정치는 ‘무한게임’일까 ‘유한게임’일까
  • 혜성의 파편
  • 승인 2022.03.31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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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제임스 P. 카스 교수는 뉴욕대 종교사ㆍ종교문학 교수와 뉴욕대 종교연구소장을 지낸 종교학자이자 무신론자다. 그는 인생을 보는 프레임으로 ‘유한 게임’과 ‘무한 게임’을 창안했다.  그가 1986년 펴낸 저서 <유한 게임과 무한 게임(Finite and Infinite Games>은 ‘인생이라는 게임에 대한 형이상학적 고찰’을 담았다는 평가를 받는 명저이자 유명 인사들의 필독서이기도 하다.  

무한 게임, 유한 게임? 좀 생소한 표현이지만 그 본성을 접하면 인생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데 유용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카스 교수는 ‘유한 게임은 승리를 목적으로, 무한 게임은 게임 자체의 지속을 목적으로 한다’고 정의했다. 그래서 “유한 게임은 누군가 이겨야 하고, 그 게임에는 확실한 끝이 있어야 한다. 유한 게임은 누군가 이겼을 때 끝난다”고 했다. 우리가 늘 접하는 현실의 승부 대부분은 유한 게임과 포개진다. 

그런데 이 책에서 말하는 무한 게임은 우리의 일상과 좀 다르다. 카스 교수는 “무한 게임의 유일한 목적은 게임이 끝나지 않도록 하는 것, 모든 사람이 플레이를 계속하는 것”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기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는 활동이 모인 게 바로 무한 게임이다. 심지어 무한 게임의 규칙은 ‘누군가 게임에서 승리하는 것을 방지하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플레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바뀐다’고 했다. 누군가가 이겨서 끝나서는 결코 안 되는 게임이 바로 무한 게임인 셈이다.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유한 게임과 달리 무한 게임은 인류의 삶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한눈에 쏙 들어오지 않는 게 사실이다. 카스 교수도 무한 게임은 딱 부러지게 이런 것이라고 단언하기보다는 그 속성을 나열하는 선에서 설명을 그친다. 그렇지만 무한 게임이 어떤 메커니즘과 속성을 가졌음을 대략 이해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을 후끈 달군 대통령 선거와 정치는 본질적으로 어디에 속하는 걸까? 대선이 ‘유한 게임’이라면 정치는 ‘무한 게임’에 가깝다. 승부를 내야 한다는 점에서 선거는 ‘유한 게임’이고 가장 큰 판이 걸린 대선은 가장 전형적인 ‘유한 게임’이다. 

반면 정치는 지속돼야할 그 무엇이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정치가 끝나는 순간 대한민국의 헌정질서도 중단됐다는 점을 상기해보라. 따라서 체제 유지 차원에서도 정치는 ‘끝나지 않아야 하는’, 즉 영속돼야 한다는 점에서 ‘무한 게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카스 교수는 유한, 무한 게임의 상관관계에 대해 “유한 게임은 무한 게임 안에서 진행될 수 있지만, 무한 게임은 유한 게임 안에서 진행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대선과 정치를 대입해보자. ‘대선(선거)은 정치 안에서 진행될 수 있지만, 정치는 대선 안에서 진행될 수 없다’로 치환된다. 대선 당일(3월 9일)은 물론이고 대선 국면(대략 3~6개월)에서 여야 모두 정책과 예산의 포퓰리즘이 난무한 현실을 돌이켜보면 대선 기간 동안 정치는 간단하게 그 본령에서 벗어나고 왜곡됐다. 선거 국면에서는 정치(政治)가 숨쉬기 어려운 것이다.  

대선이 끝났지만 대한민국은 아직 대선의 강력한 자기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3월 22~24일 실시된 한국갤럽 여론 조사를 보자. 윤석열 당선인이 대통령으로서 일을 ‘잘할 것’이란 응답이 55%에 그쳤다. 이는 과거 비슷한 시기 한국갤럽의 같은 조사에서 80%를 안팎을 기록했던 당선인(이명박, 박근혜, 문재인)의 직무 수행 긍정 전망에 한참 못 미치는 수치다. 당시만 해도 당선인을 지지하지 않았던 반대층에서도 60~70% 정도가 당선인이 잘할 것이라는 기대를 피력했다. 하지만 이번 대선 후 갤럽의 조사에서는 윤 당선인의 반대층에서는 불과 25%만 윤 당선인이 잘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이는 정치적 양극화가 격화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치라는 ‘무한 게임’보다는 선거라는 ‘무한 게임’의 관점에서 차기 정부의 국정을 바라보는 이들이 증가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유한 게임과 무한 게임(Finite and Infinite Games>을 펴낸 국내 출판사  ‘마인드 빌딩’은  경영컨설턴트 사이먼 사이넥의 사례를 소개한다. ‘가장 많이 본 TED 강연’ 4위의 주인공인 사이먼 사이넥은 이 책에서 영감을 얻어 2019년 <무한 게임>이라는 신작을 펴냈다. 이 책에서 사이넥은 비즈니스에 어떤 결승선이나 종료 휘슬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그 본질을 오해하고 착각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 비즈니스 리더와 플레이어들은 승패와 규칙에 대한 집착을 넘어 ‘무한의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는 정치에도 적용된다. 선거는 승패를 가리는 걸로 끝이 나지만 정치는 결승선이나 종료 휘슬이 없다. 상대방을 전제로 내가 존재하는 게 정치다. 정치는 끝나서는 안 되는 ‘무한 게임’이다. ‘유한 게임’과 ‘무한 게임’의 속성은 한국 정치의 리더와 플레이어들이 한번 곱씹어볼 만한 개념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