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코드-비거니즘] 비건은 식성(食性)이 아니다 ②비건 레더
[컬처코드-비거니즘] 비건은 식성(食性)이 아니다 ②비건 레더
  • 이서련 기자
  • 승인 2022.03.21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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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collectivefashionjustice.org

우리 사회에서 채식주의자의 수는 늘어가고 그중 비건의 증가세도 가파르다. 국내 비건의 수는 150만명 정도로 추산하는데, 채식주의자 전반으로 범위를 넓히면 이들의 숫자는 훨씬 커진다. 이제 더 이상 '소수'가 아닌 이들은 라이프스타일의 아주 중요한 트렌드 코드로서 자리잡았다. 입는 것, 바르는 것, 타는 것 등 의식주(衣食住)의 전 방향에서 비건이 부각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비건의 배경이 건강과 문화로 시작했다면, 이제 비거니즘은 의류·잡화 등 일상 소비재를 통해 그 자체로 철학을 드러낸다.

■'잔인한 가죽'은 거부한다...가치관을 입고 신는 이들

전 세계 가죽 산업은 1000억 달러 규모에 육박한다. 인류가 가죽을 얻기 위해 매년 희생하는 동물의 수는 매년 10억 마리 이상이다. 가죽 산업은 그 역사나 의존도 면에서 우리에게 익숙하고 필요성은 인정 받고 있지만, 환경과 윤리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다만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과 채식주의자가 늘고, 국제 동물 보호 단체(PETA) 등 NGO가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이면서 최근 분위기는 달라지는 추세다. 

패션업계는 대안 레더·퍼를 내놓으며 이러한 흐름에 합류하고 있다. 과거에는 '가짜', '인조'라는 의미의 '페이크'를 붙였지만, 이제는 가치관이 포함된 '에코', '비건', '버핑(Buffing)' 등을 붙인다. 식물성 가죽은 동물을 죽이지 않아 윤리적임은 물론, 미세 플라스틱도 배출하지 않아 환경 면에서도 고마운 소재다. 

명품 브랜드 구찌는 2년간 자체 연구 개발을 통해 목재 펄프와 비스코스 등 식물성 원료 기반의 '비건 레더'를 내놓았다. 지난해 6월에는 비건 스니커즈 라인도 출시했다. 기존의 가죽 원자재를 비건 레더로 대체한 것인데, 기존 가죽과 같은 방식으로 무두질 처리됐기 때문에 육안으로 볼 때 가죽과 다르지 않다고 구찌는 설명한다.

단순히 일회성, 이벤트성 출시가 아니다. 구찌는 자사가 만든 비건 레더 소재에 '데메트라(Demetra)'라는 이름을 붙여 상표를 출원했다. 데메테르는 그리스 신화 속 농업과 수확의 여신 이름으로,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선택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는 세계 패션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인사다. 공공연하게 '농업 추구성'을 드러낸 구찌는 이 소재를 스니커즈, 핸드백은 물론 액세서리 등 모든 컬렉션에 사용하기로 했다.

업계의 반응도 좋다. 업계에서는 그간 윤리, 젠더, 환경 등 사회 어젠다에 대해 목소리를 내온 구찌 브랜드가 더욱 인기를 이어갈 거라는 평가다. MZ세대가 중요시하는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고 지속적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자세가 지속가능성을 높여주고, 럭셔리 브랜드로서의 명성에도 도움을 줄 거란 전망이다.

h&m브랜드ㅣecotextile.com
H&M은 선인장을 활용해 만든 비건레더로 자켓을 판매하고 있다.ㅣecotextile.com

하이엔드 럭셔리 브랜드 에르메스도 마찬가지다. 에르메스는 버섯 균사체를 이용, 진짜 가죽과 유사한 촉감과 내구성을 가진 비건 레더를 만들어 냈다. 이 회사는 지난해, 미국 바이오 테크 스타트업인 마이코웍스(MycoWorks)의 비건 레더를 에르메스가 3년 가까이 협업해 테스트해왔고 그 결과로 연말까지 빅토리아 백을 비건 레더로 출시한다고 밝혔다. 제조 공정은 기존 빅토리아 백과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격이 저렴하지는 않다. 식물성 가죽의 원가가 싸지 않은 데다, 회사의 높은 품질 기준에 맞게 비건 레더를 무두질·마감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간 대규모 악어 농장을 보유해 동물 보호 단체들의 눈총을 받아 온 에르메스는 이를 통해 점점 변화하는 시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럭셔리 브랜드 외 패스트 패션 업계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이 활발하다. 그간 패스트 패션 업계는 의류 사용주기가 짧아지게 했다는 점에서 환경오염의 주범이라는 지탄을 받아온 바 있다. 소비자에게 유행에 맞는 옷을 빠르게 공급하고 소비하도록(버려지도록)했다는 것.

이에 H&M은 선인장을 활용해 만든 비건 레더로 옷을 만들거나 와인 양조 과정에서 부산물로 남는 포도 껍질, 줄기로 신발을 만드는 등 다양한 시도를 했다. 타미힐피거는 사과 껍질로 신발을 생산했으며, 푸마와 휴고보스도 파인애플 줄기와 잎에서 섬유질을 추출해 만든 비건 레더로 옷과 신발을 만들어냈다. 이 밖에도 미역, 해조류, 바나나껍질, 물고기 비늘 등 이미 많은 소재가 시도되며 제품 출시를 기다리고 있다.

[비즈트리뷴=이서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