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 유해, 78년만에 고국품에 안겼다
홍범도 장군 유해, 78년만에 고국품에 안겼다
  • 구남영 기자
  • 승인 2021.08.15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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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홍범도 장군 묘역에서 추모식을 하고 있다. 홍 장군은 크즐오르다에서 고려극장의 경비 책임자 격인 수위장으로 노년을 보내다 1943년 생을 마감했다. 이날 문재인 대통령은 봉오동·청산리 대첩의 '영웅'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기 위해 카자흐스탄 현지로 특별사절단을 보냈다.ㅣ연합뉴스
14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홍범도 장군 묘역에서 추모식을 하고 있다. 홍 장군은 크즐오르다에서 고려극장의 경비 책임자 격인 수위장으로 노년을 보내다 1943년 생을 마감했다. 이날 문재인 대통령은 봉오동·청산리 대첩의 '영웅'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기 위해 카자흐스탄 현지로 특별사절단을 보냈다.ㅣ연합뉴스

항일무장 독립투쟁 후 이역만리(異域萬里) 카자흐스탄 땅에서 잠들었던 홍범도(1868~1943) 장군이 서거 78년 만에 고국 품에 안겼다. 문재인 대통령은 15일 오후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 나가 카자흐스탄에서 봉환된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직접 맞이했다. 정부는 대전현충원 현충관에 유해 임시안치소를 마련하기로 했으며, 현충탑 앞에는 추모 제단을 마련해 방역 수칙을 준수하며 추모가 가능하도록 할 계획이다.  또 홍범도 장군의 넋을 기리기 위해 16∼17일 이틀간 온·오프라인 국민추모제가 진행되며, 유해는 18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을 단장으로 한 특별사절단은 지난 14일 홍 장군이 안장된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도착해 현지 추모식을 거행했다.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인 우원식 의원, 독립군 역할을 열연한 배우 조진웅씨가 특사단으로 함께 했다. 현지 고려인협회 주관 제례 의식 따라 묘역에 안장된 홍 장군의 유해를 인수한 뒤, 현지 병원에서 임시 안치와 정식입관 과정을 거쳐 봉환길에 올랐다.

홍범도 장군은 1920년 6월 최진동 장군과 함께 독립군을 이끌고 봉오동 골짜기에서 추격 일본군 157명을 섬멸시키며 항일무장 독립투쟁 역사상 최초의 전면전 승리를 거뒀다. 봉오동 전투는 4개월 뒤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 승리로 이어졌다. 홍 장군은 이듬해인 1921년 연해주로 거처를 옮긴 홍 장군은 '만주 사변'을 계기로 소련군 일원이 됐다. 1923년 군복을 벗고 연해주 집단농장에서 일을 하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으로 카자흐스탄 크즐오즈다 지역으로 밀려났다.

평양 출신인 홍 장군은 김일성의 항일 행적과 비교된다는 이유로 북측에서 조차 주목받지 못했고, 반공을 이유로 남측에서 조차 배척당한 경계인의 삶을 살다가 1943년 10월 크즐오르다에서 숨을 거뒀다. 사후 기준으로는 78년, 항일투쟁 기준으로는 100여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항일 독립운동의 영웅 홍 장군은 소련 정부의 극동 한인 강제 추방에 따라 중앙아시아인 카자흐스탄으로 강제로 이주당해 극장 수위' 생활과 정미 공장 근로자로 살다가 조국 광복을 2년 앞둔 1943년 생을 마감했다. 소련 정부가 1937년 8월 21일 연해주 한인들을 연말까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라'는 극비명령을 내려 17만 명이 넘는 한인들이 고단한 삶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한인 강제이주 배경 분석 엇갈려…"일본의 간첩 차단하라"

강제 이주의 배경을 놓고 국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은 당시 고려인들이 일본의 간첩으로 활동한다는 명목으로 소련이 강제 이주 정책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소련 당국이 결의한 비밀문서에도 드러나 있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 등은 한인들의 이주 문제에 대한 결의안에서 이주의 목적을 일본 간첩들이 극동에 침투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러시아 관영 타스 통신은 지난해 9월 "바로 퇴거에 착수하라"라는 특집기사를 통해 소련 당국자들이 극동의 한인 사회를 잠재적으로 위험하다고 판단하게 된 배경은 러시아 제국과 일본과의 전쟁(1904년∼1905년)에서 패배한 데 있다고 설명했다. 소련 당국이 러-일 전쟁 패배의 이유 중 하나를 한인과 중국인을 적극적으로 정보원으로 활용한 일본 당국의 정보전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이후 일본이 만주 지역에 1931년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세우면서 일본인과 외모 구별이 어려웠던 한인과 중국인들에 대한 소련 당국의 의심은 커져만 갔다. 타스 통신에 따르면 1934년 12월 소련 극동 국경수비대 담당자인 바실리 셰르나셰프는 모스크바에 "일본인들은 접경 지역에서의 한인들을 이용해 전면적으로 간첩을 조직하고 수행하는 작업을 강화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타스 통신은 또 연해주 한인 사회 내부에서 일어났던 분열이 소련 당국이 한인들을 일본의 간첩으로 의심한 데 있어서 도움을 줬다고 주장했다.

그때 러시아의 사회주의 독립운동 세력은 상하이에 본부로 둔 한인사회당 지부(상하이파)와 고려공산당 중앙총회(이르쿠츠크파)로 양분됐었다. 한인 사회의 내부 경쟁이 불신으로 작용, 서로를 일본의 스파이로 내몰았다는 얘기다. 하지만 대부분의 극동 거주 한인들은 반일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한인들의 일본 스파이 활동을 내세워 강제로 이주를 진행했다는 것과 관련해서 소련의 오해였거나 다른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는 이유다.

홍범도 장군ㅣ연합뉴스
홍범도 장군ㅣ연합뉴스

일본과 대립하기 싫었던 소련의 선택이었나
    
한인 강제 이주가 시작되자 일본은 재빨리 외교 라인을 통해 소련에 항의한다.  소련은 한인 강제 이주를 자국 시민에 대한 문제라고 주장하며 선을 그었지만, 일본은 한인들을 자국민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식민지 조선에까지 알려졌다. 이를 두고서는 식민지였던 조선의 민중들에게 소련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심어주기 위한 일본의 계산이 깔렸을 것이라는 분석이 우리 학계에서 나온 바 있다.  한인들을 자국민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이 극동에 정세에 관여하려 하는 행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이주를 감행했다는 의견도 있다.  2011년 당시 동국대 이원용 연구교수의 '1937년 고려인 강제 이주의 원인 및 과정'에서는 "편향된 사회주의 이념과 민족 관념을 갖고 있었던 스탈린 정부가 철저한 실리주의 정책을 추구하는 데서 비롯됐다"고 나타나 있다. 논문에 따르면 스탈린 정부 시기(1930년∼1936년)의 전면적인 국유화와 집단화로 민심이 흉흉해진 상태에서 일본과의 전쟁 준비는 미흡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탈린 정부는 일제에 부담이 되는 반일 성향의 극동 한인들을 강제 이주시켜 일제와 전쟁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보여줬다는 것이다.  스탈린 집권 이후 소수민족에 대한 소련 당국의 배타적 태도도 원인으로 거론된다. 추가로 러시아 학자들 사이에서는 강제 이주의 원인을 한인들의 탁월한 농작물 재배 능력과 연관 짓는 목소리도 있지만, 힘을 얻지는 못하고 있다. 원인이 어떻게 됐건 한인 강제 이주의 과정이 비인간적이었다는 의견이 많다. 홍범도 장군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소련 당국은 총 124대의 수송 열차를 동원했다. 한인들은 창문이 없는 열차나 화물칸, 가축용 운송 칸에 실려 중앙아시아까지 이동해야만 했고, 이송 도중에는 숨지는 이들도 있었다. 열악한 여건 속에서 열차를 타고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고려인들은 특유의 성실함으로 척박한 토지를 개간해 농토로 키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