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신드롬이라고 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우영우가 강자예요. 모르겠어요?”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변호사가 공식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아버지 빽으로 대형 로펌에 입사했다고 의심하며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동료 변호사의 불만입니다.
달리 보면 치열한 경쟁과 이른바 ‘뒷배’ 하나 없다는 절박함이 그를 인정머리 없는 악역으로 내몰았을 것이라고 이해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또 그의 모습에서 요즘 청년 남성의 분노와 억울함, 그리고 공정에 대한 갈망도 엿보입니다.
그의 다음 대사는 이렇습니다. “이 게임은 공정하지 않아.
우영우는 우리를 매번 이기는데 우리는 우영우를 공격하면 안 돼. 왜? 자폐인이니까.
우영우가 약자라는 거? 그거 다 착각이에요.” 그에게 우영우는 약자도 아니고 소수자도 아닙니다.
그냥 동료도 아닌 경쟁자일 뿐입니다. 더 힘센 능력자이면서 부당한 특권을 등에 업고 있는 비열한 경쟁자입니다.
결국 공정의 문제입니다.
공정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핫하면서도 힘이 센 단어 중 하나입니다.
공정이라는 슬로건 아래 지난 몇 번의 정권이 교체됐고 선거 때마다 공정이라는 아젠다는 승리의 필수 전략이었습니다.
공정은 한국사회의 온갖 문제를 재단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신통한 기준이자 절대 침범해서는 안 될 보루가 됐습니다.
공정은 공평하고 올바름입니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고르다는 산술적 평등을 뜻하는 공평에다 올바름이라는 윤리적 판단이 더해져야 공정이 완성됩니다.
이 두 가지 기준을 가진 공정은 곧잘 무적의 논리가 됩니다.
‘불공정’을 외치는 이들은 상대가 ‘평등의 엄격함’을 어긋났다고 비난하는 한편 ‘부도덕하다’고 질타합니다.
공정은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쌓아 올린 공동체적 가치의 중추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불리하고 어떤 때는 본능과 부딪히더라도 공정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개인의 유불리를 뛰어넘는 공정의 가치가 우리 모두를 지킬 수 있고 또 지속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공정은 또 강력한 심리적 욕구이기도 합니다.
지나치게 사로잡히면 사회적으로는 집단폭력이나 잔인한 처벌을, 개인적으로는 고립과 증오심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공정의 부정적인 결과를 방지하는 게 바로 공감입니다. 공감은 상대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상대를 이해하는 여지가 됩니다.
공정과 공감이 균형을 이룰 때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됩니다.
공정의 외침만큼 공감의 목소리도 커져야 진정한 ‘공정사회’를 기대할 수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