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송창식의 노래로도 유명한 서정주 시인의 《푸르른 날》입니다.
볼 때마다 이 시는 처음부터 아예 노래로 만들라고 지은 것 같습니다.
내 노래방 애창곡이기도 합니다.
젊은 친구들과 같이 간다면 ‘아재’ 같다고 놀림받을 게 분명하지만.
3행의 ‘저기저기 저’와 4행의
‘초록이 지쳐’는 똑같이 5음절입니다.
‘가을 꽃자리’를 가리키는 데는 ‘저기 저’ 3음절로 충분한데도 ‘저기’를 한번 더 반복해서 뒤에 오는 ‘초록이 지쳐’와 운율을 맞췄습니다.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로 가는 계절의 변화를 이보다 더 멋지게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4행의 ‘초록과 단풍’을 지나면 5행에서 ‘눈이 나리고’ 6행에는 ‘봄이’ 옵니다.
열 줄 짧은 시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들어있습니다.
어제부터 기온이 눈에 띄게 떨어졌습니다.
도저히 지칠 것 같지 않던 청춘, 푸르던 잎들도 이제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비가 그치고 시리도록 맑고 푸른 하늘을 보니까 이 시가 생각났습니다.
친일 행적과 기회주의적 어용 논란에도 불구하고 《푸르른 날》 한 편만으로도 시인은 용서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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