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다이어리] 사람의 기억은 완벽할까
[생각다이어리] 사람의 기억은 완벽할까
  • 신형범 칼럼리스트
  • 승인 2022.09.09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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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기억이라는 게 얼마나 불완전한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유명한 예가 영화 《라쇼몽》입니다.
1951년 베니스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이 영화는 저작권 기한인 70년이 지나서 유튜브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데 지금은 영화예술의 고전이 됐습니다.

《라쇼몽》은 아내와 함께 여행하던 사무라이가 강도를 만나 칼에 찔려 죽은 사건 얘기입니다.
영화가 주목받은 이유는 한 사건을 두고 목격자인 나무꾼의 시각과 아내의 시각,강도의 시각 그리고 무당이 불러낸 죽은 사무라이 영혼의 시각까지 조명한 독특한 관점 때문입니다.
하나의 사건이 각자의 입장에 따라 어떻게 왜곡되고 정당화될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라쇼몽》이 너무 오래된 영화라 진부하게 느껴진다면 2000년 홍상수 감독의 《오수정》도 괜찮습니다.
케이블TV 구성작가인 수정(이은주)과 영화감독 지망생 영수(문성근), 영수의 후배 재훈(정보석),이 세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통해 소통의 부재와 기억의 부정확함을 홍상수만의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전반 앞부분은 순수해 보이는 부잣집 아들 재훈의 시각에서 수정과의 만남을 묘사하고 뒷부분 절반은 수정의 시각에서 동일한 사건을 재구성합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두 이야기가 똑같아 보이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둘의 기억에는 일치하는 게 별로 없습니다.

사소한 대화지만 상황이 전혀 다르고 존댓말을 쓰는지 여부도 일치하지 않고 사건의 진행도 순서가 서로 엇갈립니다.
완전히 똑 같은 장면에서도 수정의 기억에는 명확히 존재하는 사람이 재훈의 기억에는 아예 등장조차 하지 않습니다.
각자의 기억으로 재구성한 결과입니다.

얼마 전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아버지를 모시고 고향에 갔을 때 일입니다.
아버지를 포함해 서로 비슷한 연배의 어르신 네 분이 오랜만에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는 비슷했지만 자라면서 각자 살아온 배경과 경험, 배운 지식도 다르기 때문에 어떤 문제를 놓고 해석하는 방식과 범위,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네 분은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각자 이야기를 구성하고 스토리를 만들어냅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도 본인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만 듣고 나머지는 흘려보내거나 다음에 자신이 할 말을 생각하느라 상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않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듣긴 듣지만 자기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나중에 이 네 사람이 이 만남을 기억한다면 각각 다른 얘기를 할 것이 분명합니다.
법률적인 언어로 얘기하면 ‘실체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분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까요.그렇지 않습니다.

이 상황을 재구성하면서 자기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각자 자기가 처한 입장에 따라 문제를 이해하고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상황을 자기 방식대로 정리하고 나면 나중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기억’을 진실이라고 믿게 됩니다.

내가 얻은 교훈은 사람은 각자 자기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인간의 본질적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려는 노력을 할 때에만 그나마 진실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합리적인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래야 원론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지극히 ‘원론적인’ 깨달음을 얻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