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실리콘밸리와 한국 정당에 부는 ‘중퇴’ 신드롬의 두 얼굴
[시론] 실리콘밸리와 한국 정당에 부는 ‘중퇴’ 신드롬의 두 얼굴
  • 혜성의 파편
  • 승인 2022.08.02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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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게이츠, 스티브잡스, 마크 저커버그의 공통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글로벌 첨단산업의 창조자 반열에 드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두 대학을 중퇴했다는 점이다. 기술 산업에서 성공한 창업주에게 ‘중퇴’라는 이력은 거의 종교적 팬덤을 만들어준다고 애드리언 도브 스탠퍼드대 교수는 저서 <실리콘밸리, 유토피아&디스토피아(원제 : What Tech Calls Thinking)>에서 진단했다. 실리콘밸리의 거물들이 제일 잘하는 아이디어 습득 방식도 ‘중퇴’라는 얘기가 나돈다고 저자는 전하고 있다.

한국의 정치에서도 다른 방식의 ‘중퇴’가 종종 꼬인 매듭을 푸는 방편으로 동원된다. 20대 대선에서 패배해 권력을 내려놓은 더불어민주당은 당 지도 체제를 ‘비상대책위’ 체제로 전환해 정권재창출 실패의 충격을 흡수하고자 했다. 여당인 국민의힘도 당 대표의 당원권 정지와 직무대행의 사퇴로 지도부가 사실상 와해되면서 비상대책위로 말을 갈아타는 형국이다. 여,야 모두 현상을 유지하기 힘들 때 의탁하는 방법이 바로 비상대책위와 같은 지도체제 개편이었음은 오랜 한국의 정치 역사가 증명한다. 

실리콘밸리의 중퇴자들은 광야에 홀로 섬으로써 경쟁력을 축적하고 명예를 드높인다. 기술 산업 중퇴자들은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사고와 독립성이라는 어휘들을 공유한다. 

한국 정당의 중퇴는 경로를 달리한다. ‘비대위 우산’이라는 전통적 방식에 의지하고 의존성을 강화한다. 부채를 갚지 않고 퉁치려는 청산주의이자, 책임의 소재를 흐리는 꼬리 자르기용 ‘중퇴’라는 심증을 품게 한다. 비대위의 등장은 기존 지도체제의 ‘몰락’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불명예의 한 단면이기도 했다.   

실리콘밸리의 창업자들은 신기술 등장에 무신경한 기존 체제를 자극하고 하고 교정하는 한 방편으로 그들의 회사를 세운다는 소명의식을 불태웠다. 창업을 통한 공동체적 교정이라는 비영리적 동기가 자양분 역할을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신기술산업의 태동은 현상을 타파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혁신 DNA 개조 운동과 맥을 같이한다고 애드리언 도브 스탠퍼드 교수는 진단한다.

한국 정당의 ‘중퇴(지도부 해체 및 비대위 구성)’도 통상 더 나은 방향으로의 완전한 다름을 뜻하는 환골탈태(換骨奪胎)를 명분으로 내세우기는 한다. 현상 타파와 변화를 표방하는 것이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를 통해 숨 돌릴 공간을 얻어 시간을 벌어보자는 잇속의 동기가 작동한다. 한국 정치에서의 ‘중퇴’는 내부 DNA 개조와는 특히 무관하다. 차라리 외부의 환경 변화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소나기는 피하고 본다’는 상황논리의 산물에 가깝다. 정치는 상대가 있는 게임이라서 나는 가만히 있어도 상대의 실책이 내게 지지율 반등을 안겨다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직전 두 번의 대통령선거 결과가 그랬다. 집권자에 대한 반감과 혐오가 야당에 정권 교체를 안긴 기억이 생생하다. 여야 정당은 발전의 DNA를 축적하기보다는 상대의 몰락을 부추긴 보상으로 정권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집권의 경험을 가진 정당은 국민의힘 계열과 더불어민주당 계열뿐이다. 두 정당은 서로를 배척하면서도 없으면 아쉬워하는 ‘적대적 공존’ 구조에 오래 물들어왔다. 3월 9일 대선 이후 지지율이 떨어지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비대위를 구성하는 모습도 닮음꼴이다. 정치 행위자들도, 관찰자들도 이들 정당이 그들의 말처럼 스스로를 제대로 성찰하고 과분한 권리를 반납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저 뭔가는 해야 하기에 ‘중퇴’로 귀결되는 지도체제 개편을 기계적으로 단행했을 뿐이다. 밖에서 보면 아주 기이한 일들이 안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게 한국의 주류 정당의 존재형식이다. 

실리콘밸리는 ‘중퇴’를 기반으로 미래산업의 신기원을 열고, 한국 정당은 ‘중퇴’를 통해 내부의 문제점을 가린다. 비대위 체제로 숨는 데 익숙한 한국 정당은 스트레이트를 피하려고 보디 블로(Body blow, 가슴과 배에 가하는 타격)을 허용하는 복서의 길을 간다. 보디블로는 서서히 효과를 나타내기에 이를 자주 허용한 복서는 어느 순간에 자기도 모르게 다리가 풀리는 상황에 직면한다. 이런 식으로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중 어느 쪽의 다리가 먼저 풀리느냐의 선택만 남은 게 한국 정당정치의 현주소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