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다이어리] 모두의 해방일지
[생각다이어리] 모두의 해방일지
  • 신형범 칼럼리스트
  • 승인 2022.06.14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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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가진 술자리에서 얼마 전 끝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얘기가 나왔습니다. 한 친구가 갑자기 물었습니다.
 “드라마가 무슨 얘길 하는 거냐?” 여러 생각이 떠올랐지만 자리가 어수선한 데다 깊이 얘기할 분위기가 아니어서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는데 집으로 오는 길에 생각을 정리해봤습니다.

서울 근교 경기도의 한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는 염씨네 삼남매를 중심으로 드라마는 시작합니다.
드라마 초반에 서울로 출퇴근하는 삼남매의 일상을 반복하면서 지루하다는 평도 있었으나 막내 염미정이 이름도 모르는 외지인 구씨에게 “날 추앙해요. 난 살면서 한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사랑으론 안 돼”라고 말한 게 화제가 되면서 관심이 커졌습니다.

드라마에선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문어체 대사에다 ‘추앙’이라는 단어가 주는 생경함과 왠지 오글거리는 느낌이 묘하게 남았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은 ‘추앙커플’로 불리며 응원을 받았고 ‘나쁜남자’ 스타일인 구씨는 명품 브랜드 ‘구찌보다 구씨’라며 ‘구씨앓이’ 신드롬을 만들었습니다.

내 삶의 주인공이 내가 아닌 것 같고 늘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며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한 미정은 구씨에게 뜬금없이 ‘나를 추앙하라’고 도발합니다.왜 하필 추앙이었을까요.
관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계산하지 않고 온전히 상대의 행복을 바라는 관계를 작가는 추앙이라는 말로 회생시켰습니다.

모든 관계는 노동이고 ‘끼리끼리’는 삶의 또다른 기술입니다.
내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상대방을 욕하고 형편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사는 게 딱히 즐겁지 않고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 삶의 동력이 되곤 합니다.
염미정과 주인공들은 어렵게 한발짝 한발짝 나아갑니다. 각자의 해방을 향해.

염씨 삼남매와 구씨를 통해 보여주는 모습이 각자의 삶과 정신을 옭아매고 있는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추상적 이미지라면 염미정의 회사 동아리 ‘해방클럽’은 각자가 속한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해방의 의미를 구체화한 상징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에 이어 엄마까지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지막을 지켰던 둘째 창희는 마치 운명처럼 장례지도사의 길을 찾습니다.
공허한 마음으로 살던 미정은 구씨로 인해 사랑으로 내면을 채우게 됩니다.
행복하면 더 큰 불행이 올 것 같아 두려워하던 구씨는 아침마다 자신의 마음 속을 찾아오던 증오의 대상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자극적이고 화려한 컨텐츠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드라마는 일상에 지친 보통 사람들의 힐링을 화두로 삼아서 좀 특별했습니다.
누군가 죽거나 매회 주인공이 풀어야 할 사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아도 우리 주변 사람들의 삶 속에서 느끼는 고민을 드라마 전체에 녹여냈습니다.

‘해방’은 나를 온전히 나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남들의 시선과 평가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두려움이나 미움, 불안으로 자신을 옥죄며 살아가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입니다.

해방을 향해 나아갈 뿐 이상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은 결말은 드라마 제목의 색과 결을 유지합니다.
자유롭지 못했던, 풀지 못했던 것에 도전할 용기를 준 것도 같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고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해 보게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