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전통 있는 '견고한' 사모펀드, 우린 언제쯤?
[기자수첩] 전통 있는 '견고한' 사모펀드, 우린 언제쯤?
  • 어예진 기자
  • 승인 2020.02.12 10: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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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시작하면 며칠밤 새는 건 일도 아니라는 넷플릭스(온라인 비디오 스트리밍 업체)에 뒤늦은 합류를 했다.

금융업계 종사자들이 손꼽아 추천하는 ‘빌리언스(Billions)’를 시즌 1부터 정주행 중이다. 자수성가 한 억만장자이자 헤지펀드 대표 바비 액설로드와 뉴욕 연방 서부지검 검사국장 척 로즈와의 대립을 다룬 드라마다.

그런데 바비 액설로드의 불공정 거래, 뇌물 수수를 두고 척 로즈와 날선 대립을 이루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2016년에 만들어진 드라마인데, 보는 내내 국내 사모펀드업계의 상황들이 오버랩 됐다.

특히, 주인공인 바비가 자신을 고객을 빼앗은 경쟁사 오너와 나눈 대화는 국내 사모펀드업계 종사자들이 꼭 한 번 봤으면 하는 마음일 정도다.

바비는 나이 지긋한 경쟁 사모펀드사 대표에게 이렇게 분풀이한다.

“우리 업계는 약육강식. 오직 하나만 남는다. 켄 너를 원망하지 않아.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그래도 난 올해 32%를 벌었거든. 네가 소심하게 숨고 빠지는 방식을 통해 버는 것보다 30%포인트를 더 벌었어.”

여기에 경쟁사 대표 켄이 답한 말이 아주 명언이다.

“네가 뭐라고 부르던 상관은 없지만 나는 그걸 ‘조심한다’고 해, ‘위험 회피 투자(Risk-averse)’. 내가 펀드를 만들었을 때, 난 사람들이 내 손에 쥐어주는 ‘책임감’을 아주 잘 알고 있어. 내가 내 투자에 대해 ‘헤지’를 하는 이유야. 원금을 지키기 위해. 내가 이 바닥에서 너처럼 잘나가는 ‘스타’는 아니어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난 흔들림 없이 지금까지 버티며 살아남아 있어.”

미국 드라마 빌리언스(Billions)의 한 장면 / 사진=Google
미국 드라마 빌리언스(Billions)의 한 장면 / 사진=Google

옆에서 지켜보던 VIP 고객마저 바비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이 말엔 뼈가 있다.

“바비, 당신은 우리에게 많은 수익을 가져다 줬지요. 그런데 나는 안정적인 자산운용을 해야 하거든요. 나의 일은 펀드매니저가 사고치기 전에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는 겁니다. 그걸 고객들이 기대하기도 하고요. 제 고객들이 보기에는 켄은 무미건조 지루한 사람이지만 ‘견고’합니다.  무너지지 않는 하늘처럼요. 가끔은 그런 게 중요하지요.”

문득 "한국에도 이런 곳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사모펀드 업계 종사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봤다. “혹시 한국에도 오랫동안 꾸준하게, 무리하지 않고 수익을 내고 있는 ‘견고’한 곳이 있을까요?”

모두에게 돌아온 답은 “없다” 였다. 어떤 사모펀드사 대표는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헤지펀드 역사도 짧고, 규모도 너무 작죠. 더구나 시장 상황상 그러기 힘들어요. 잘되는 펀드 있으면 너도 나도 만들어내는데, 시장 수요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구조죠.”

실제로, 한국의 헤지펀드 규모는 10년간 급속하게 발전했지만, 규모는 여전히 작다. ‘한국형 헤지펀드’는 2011년 말 전체 순자산 2400억원을 시작으로 지난해 말 기준 34조5400억원까지 불어났다. 그러나 34조라는 금액은 미국 헤지펀드 10위(Viking Global Investment) 한 곳의 전체 운용자산에 불과하다.

미국 헤지펀드 시장에서는 ‘떠오르는 샛별’은 없다. 1975년에 설립돼 45년째 운용을 이어오고 있는 브릿지워터 어소시에이츠(Bridgewater Associates)는 미국 헤지펀드 1위사다. 지난해 2분기 기준 운용자산은 156조7400억원에 달한다. 개인 고객이 아닌 기관, 연기금 등의 자금만 받으며 ‘위험 배분’ 전략 위주로 운용되고 있어 규모가 압도적이긴 하다. 2위인 르네상스 테크놀로지스(Renaissance Technologies)도 1982년에 세워졌다. 전체 운용자산은 80조7100억원에 달한다. 가장 낮은 수익률이 21%였다는 ‘메달리온 펀드’로 유명한 곳이다. 상위 10개 가운데  가장 어린 곳마저 2001년에 설립된 투시그마 인베스트먼드(Two Sigma Investment)다.

못해도 20년, 길게는 40여 년 동안 이들을 지탱해온 것은 과도한 레버지리도, 과감한 리스크 테이킹(Risk-taking)이 아닌 자신만의 투자 철학, 그리고 고객의 돈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결국 자신들만의 ‘전통’을 가지고 안전하게 걸어온 곳이 업계 ‘톱’이다.  

지난 10일 국내 헤지펀드 1위 라임자산운용의 2개 펀드에 대한 실사 결과가 공개됐다. 지난해 10월 기준 펀드 평가액이 1조원 가까이 됐던 ‘플루토 F1D-1호’는 회수 가능 비율이 50~65%로 최대 절반가량이 증발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2015년 하반기 이후 금융당국의 사모펀드에 대한 규제가 대폭 완화되면서 사모펀드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가 유동성 위기에 소리 없이 사라진 곳이 이미 많다. 1등이 신뢰와 유동성이 흔들리고 국내 자본시장마저 불안해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이제 막 10년차에 접어드는 한국 헤지펀드들도 시장의 수요는 그만 좇았으면 좋겠다. 1등이 무너지면 그 뒤에 놓여있는 도미노 블록들은 시간문제다. 시장에 이끌려 가기보다는 시장을 이끄는 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자신만의 정체성 있는 좋은 펀드를 만들 수 있는 시장 환경과 운용사의 인내가 필요한 시점이다. 여기에는 투자자들의 성장 역시 뒷받침 돼야만 할 것이다.

20년이 지날 때쯤 투자자로 하여금 "견고하다"고 평가받는 헤지펀드사들이 적어도 하나 이상은 생겨나길 희망한다.

 

[비즈트리뷴=어예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