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 CEO에 물었다] ① 임기 외줄타기…"빅픽처 못그리고 단기실적 치중"
[증권사 CEO에 물었다] ① 임기 외줄타기…"빅픽처 못그리고 단기실적 치중"
  • 어예진
  • 승인 2018.12.17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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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2~3년, 성과는 3년차 이후…"수익 없는 새투자는 모험"

 

 

 

스티브 잡스의 멘토이자 前 애플 수석부사장 제이 엘레엇이 잡스가 세상을 떠나기 전 애플의 미래를 우려한 이들에게 한 말이 있다. “월트 디즈니, 모리타 아키오, 그리고 데이비드 패커드와 빌 휴렛은 각각 디즈니와 소니, HP를 떠나기 전에 모두 자신의 기업을 매우 강력한 조직으로 자리 잡게 해두었습니다. 물론 이 회사들은 그들이 떠난 후로도 제 궤도를 유지하며 계속 번성했죠. 스티브는 기업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여러 기본 원칙들을 안정적으로 다져 놓았습니다. 따라서 애플은 이 구조와 운영 원칙들 덕분에 계속해서 선두를 지키고 번영할 거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저서 ‘아이리더십’ 中).
여기 소개된 이들이 ‘창업자’라는 특성을 떠나 CEO(최고경영자)로서 직접 지휘봉을 잡은 기간은 다음과 같다. 스티브잡스(애플) 23년, 월트디즈니(월트디즈니)15년, 모리타 아키오(소니) 18년, 빌 휴렛·데이비드 패커드(HP) 55년.
 
[비즈트리뷴=어예진 기자] 국내 증권사 CEO들은 매년 연말이 되면 피곤하다. 올해는 어디가 임기 만료고 누가 연임 될 것 인지에 대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회사도 피곤하다. '애플' 처럼 자리잡힌 궤도와 기본원칙이 부족해, 새로 사장이 오면 업무는 도돌이표다. CEO들도 다를 바 없다. “내 책상은 언제라도 치워질 수 있다”라는 마음이다.
 
비즈트리뷴은 증권업계에 관행처럼 자리잡은 CEO의 짧은 임기와 사업 성장에 대한 상관관계에 초점을 두고 ‘전·현직 증권사 CEO 11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통해 이들의 속마음을 들어봤다. 솔직한 의견과 답변의 민감성을 고려해 익명으로 진행했다.
 
◆ “재임기간 너무 짧아”
 
전·현직 증권사 CEO 11명 중 10명이 관행처럼 자리잡은 1~3년 임기에 대해 입을 모아 '짧다'고 답했다. 실제로도 이는 외국의 동종업계에 비해서도 현저하게 짧은 시간이다. 
 
지난해 자본시장연구원이 낸 ‘국내 증권업 CEO 재임기간과 경영성과 분석’ 자료에 따르면, 제이피모건,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메릴린치, 시티등 미국의 5개 글로벌 투자은행의 CEO 재임기간 중위값은 63개월(5.25년)로 나타났다. 라자드, 에버코어 등 중소형 부티크 IB의 경우 110개월(9.16년)이다. 2~3년의 국내 증권사 CEO 평균 재임기간에 비하면 2~3배에 달한다.

증권사 CEO들이 자신의 임기가 ‘짧다’고 생각하는 가장 주요한 이유는 두 가지로 갈렸다. ‘나의 경영지침이 반영되기 짧은 시간’이라는 의견이 7명의 선택으로 가장 우세했고 ‘중·장기적인 투자가 어려운 시간’이라는 답변이 뒤를 이었다.
 
이 같은 답변은 증권업계가 여타 업종에 비해 성장이 더딘 근본 원인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국내 증권사들은 요즘 세대 말로 ‘빅픽처(Big Picture:미래를 앞서 예상하고 남들은 보기 어려운 큰 그림을 그린다는 뜻을 비유하는 말)’를 그리기 힘들다.
 
2년마다 CEO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교체되는 상황에서 그들은 단기실적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 장기적 목표를 전제로한 투자는 ‘비용 지출’로 치부되기 쉽다. 무엇보다 2년이라는 시간은, 조직의 문화와 업무 프로세스, 회사 구조에 CEO의 경영 철학이 스며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설문에 응한 한 답변자는 “수익으로 창출될 때까지 몇 년이 걸리는 새로운 투자를 진행한다는 것은 CEO로서는 상당한 모험이자 용기”라고 설명했다.
 
잦은 사장의 교체는 직원들의 업무 역량마저 위축시킨다. 2년, 3년마다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시작해야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실제로 국내 증권사 직원 K씨는 “대표이사의 잦은 교체는 신규 업무보고 등 연초에 했던 작업을 다시 해야 하는 '업무 과부하'로 이어져 본 업무는 소홀하게 될 수밖에 없다”며 “조직 변화, 보고 방식 등을 새로운 대표이사의 스타일로 2, 3년마다 변경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직원들의 업무 역량 확대와, 지속가능한 기업을 위해서는 오너 마인드로 롱런하는 대표이사가 필요하다”고 토로했다.
 
◆ 연임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것은 ‘경영실적+α
 
중복 답변이 가능한 이 질문에서, 증권사 CEO 11명 중 10명은 연임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조건으로 ‘경영실적’을 꼽았다. ‘지주 또는 오너의 판단’이라는 답변도 4명에 달했다.
 
최고경영자가 경영실적으로 평가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경영실적은 ‘숫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적 성과를 비롯해 관리 역량, 지주와의 관계, 직원과의 관계, 비즈니스 네트워크, 고객 관리 등 이 모든 것들이 경영실적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게 CEO들의 생각이다.
 
‘장기 연임을 위한 조건’에 대한 물음에는 (중복답변) ‘시장·업계 전문성’과 ‘탁월한 성과’가 각각 5명으로 가장 많았다. 최근 대형증권사 위주로 IB전문가 등의 탁월한 전문 분야가 있는 인물을 CEO로 선임하는 추세와 일맥상통한다. ‘회사(오너)의 지지’라는 의견에도 2명이 응답했다. 기타의견으로는 ‘주주가치 극대화를 위한 경영’이 있었다.
 
◆ 임기는 2~3년인데 .. 성과는 3년차 이후 나타나
 
취임 후 CEO의 능력과 성과가 실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는 시기를 물었다. ‘3년 차’ (5명)와 ‘2년 차’(4명), ‘4년 차 이상’(3명) 순으로 나타났다.

임기는 기본 2~3년인데, 임기가 끝나야 성과가 숫자로 드러난다는 모순적인 상황인 것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2~3년 이라는 시간은 CEO로서 미래 가능성을 객관적 근거로 증명해야 하는 시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자본시장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CEO 재임 연차별 증권사 조정 ROA(총자산수익률)는 초기 2년은 ±0.25% 이내인데 반해 재임 5년차 1%, 8년차 1.75%로 나타났다. 재임 3년차 이후 업계 대비 우월한 경영성과를 올릴 수 있는 가능성이 큰 셈이다.
 
이런 가운데, 실제 장수 CEO를 배출한 증권사들의 성적을 살펴보니, 안정적으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비즈트리뷴이 주요 증권사들의 10년치 총자산이익률(ROA)을 분석했다. (리먼브러더스 사태의 영향이 미친 2008년과 2009년 실적은 제외했다) 장기 연임한 CEO를 보유한 한국투자증권(유상호 2007~2018년)과 교보증권(김해준 2008년~현재), 키움증권(권용원 2009~2018년), 메리츠종금증권(최희문 2010년~현재) 등의 ROA는 회사 규모에 상관없이 업계 수준을 상회했다.
 
ROA가 높다는 것은 자산에 비해 이익이 많다는 의미로, 자산을 기준으로 볼 때 수익성이 높다고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자산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운영해 실질적으로 얼마만큼의 순이익을 창출했는지를 보여준다.  
 
◆ 잦은 CEO 교체로 인한 증권업의 한계는?

미국의 유력 경제지 ‘포브스(Forbes)’에 포춘지 선정 500대 경영자가 CEO의 임기와 관련해 이런 멘트를 실었다.
 
“최고 경영자들은 이사진과 투자자들을 만족시켜야 한다. 기본적 임무 임에도 이는 갈수록 어려워지는 추세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성숙한 시장에서 주어진 시간안에 회사 성장을 달성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극단적인 투명성을 요구하는 고객과 지속적인 혁신을 주문하는 투자자들의 중복된 요구들이 끊이지 않는다. 최고 경영자는 여기에 일일이 대응할 수 있을 만큼 빠르게 배를 움직이고 조정하기 어렵다.”
 
짧은 임기에 대한 회사 성장과 경영 역량에 대한 갈증을 나타내는 문장이다. 증권업 역시 잦은 CEO의 교체로 인해 고질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가 많다.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전·현직 증권사 CEO들이 자필로 밝힌 ‘증권사 CEO의 잦은 교체로 인한 증권업의 한계’에 대해 다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