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길청 칼럼]노후의 워라밸
[엄길청 칼럼]노후의 워라밸
  • 승인 2018.06.05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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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트리뷴] 아직도 주변에선 안타까운 죽음이 끊이지 않지만, 그러나 우리는 지금 장수사회의 새로운 인생노선을 타고 가는 모양새임에는 틀림이 없다. 어제는 선배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서 막 구순을 바라보는 연세에 떠시게 되어 유족이나 조문객이나 모두 조금은 아쉬운 분위기가 역력했지만, 얼마 만에 만난 대학후배의 이러 말을 듣게 되었다. 모교의 교수로 있는 그 후배는 나보다 2년 아래의 대학시절 학보사 후배로 아주 친한 사이로 강릉이 고향이다.
 
“그동안은 대학선생이 남보다는 긴 직장생활이라 이에 만족하고 정년이 되면 고향에 가서 쉬면서 여생을 보내려고 작은 집도 하나 장만해 두었는데, 점점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은퇴 후라도 도시에서 일이 생기면 피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그 후배가 갑자기 꺼낸 말이다. 돌아가는 지금 이 상황이 무언가 그 후배가 알던 그런 세상이 아닌 것 같다는 의미심장한 말이다.
 
왜 그만 그럴까. 교양인으로 물려받은 우리의 본 바탕의 지성은 언제나 근면과 보람 사이에서 놀아도 놀게 되어있다. 그런데 아무래도 요즘 세상이 심상치가 않으니 더욱 그럴 수밖에. 종전에는 식구들이 살만치는 벌어두었다고 더러 호언하던 친구들도 요즘은 점점 보기 힘든 세태이다. 전후와 좌우를 살펴보면 누구인들 그런 소릴 함부로 하겠는가.
 
앞으로 얼마를 살지를 점치기 어렵도록 우리의 보편적 건강 환경이나 안전인프라는 놀랍게 개선되고 있다. 그렇다고 미래의 경제성장 속도가 여전히 높게 기대되지는 않는다. 2050년을 내다보면 대체로 연간 2% 내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일 이 수치를 수익률이나 임금상승률로 대체하면 36년이 지나야 각종 수입이 지금보다 두 배로 늘 수가 있다. 나이가 60이 된 사람이라면 100을 앞두고서야 가능한 일이다.
 
요즘 갑자기 집값이 급등하고 정부가 규제에 나서고 하는 일은 얼마만 지나고 나면  아주 찰나적이고 마찰적인 일일 것이다. 아니면 아주 초부유층의 지역에서나 앞으로 있을 법한 일이다.

우리나라가 지금의 삶의 현실을 아주 오랫동안 유지하면서 살 수 있다면 이것만으로도 글로벌 사회의 평균적인 여건에서 보면 상당히 안락한 편이다. 바라건대는 누구나 이용이 가능한 저렴하고 쾌적한 사회적 주택이 도시 안에 그것도 생활일거리가 있는 주변에 풍부하게 배치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초지능형 경제사회는 아무리 좋은 직장이라고 평생 다니는 것도 아니지만, 대박 나는 사업이라고 수익이 늘기만 하는 게 아니다. 실제로 요즘 약효가 좋은 약을 만드는 제약기업 중에서 완치율이 높아져서 갈수록 매출이 줄어드는 일이 생겨나고 있다. 이웃의  차를 잘 고쳐주면 동네 카센터가 문을 닫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교수들은 먼 거리의 학생이나 방학을 위해 인터넷(실제로 인터넷의 발생기원이 교수들임)이란 원격수업 장치를 만들어 내고 이제는 자신이 그 인터넷에 치여 강의실을 떠나야 한다. 온천지에 전 세계의 명 강의가 즐비하게 인터넷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이제 노후에 다시 일을 한다는 것은 막연한 미래에 대한 또 하나의 걱정을 덜어내기 위해 꼭 필요한 생산적 힐링(healing)이고, 하나의 방어기제이기도 하다, 장마철에 우산 하나들고 길을 나서는 형국이다.
 
그럼 무슨 일을 해야 하나. 우선 노후를 앞둔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하고 생각을 해보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재무적으로만 보자면 우선 현금이 풍부해야 하고, 지식이 풍부해야 하고, 나의 고객도 풍부해야 하고. 혁신적인 행동력도 풍부해야 하고, 선한 마음도 풍부해야 하고. 가족들의 자기경영 역량도 풍부해야 한다. 이것이 소왈 재정의 미래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이 땅의 노후준비 인생들, 특히 베이비부머들에게 지금 전하고 싶은 말이다.
 
평소에 이런 삶을 준비하고 살아간다면 바로 work and life balance 라고 할 수 있다, 요즘 하는 말로 “워라밸”이다. 그러니까 누구나 평생을 일과 삶의 균형에서 살아가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이다. 저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한편으론 재능과 재미가 담겨있으면서 타인이나 사회에 유익을 주고 여기서 이익도 창출된다며 정말 일하는 휴식, 휴식 있는 일이 이 바로 그런 상황일 것이다.
 
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주식을 공부하는 일은 고시공부가 아니고 정보여행에 가깝고, 사업을 좋아하는 사람이 새로운 아이템을 연구하는 일은 두려움이 아니라 설레임이다. 대체로 정년이후에 모든 걸 내려놓고 쉬고자 하는 결정을 내리는 분들은 매일매일 여기저기 사주경계를 하면서 살았다기 보다는 평생 앞만 보고 달린 사람들이다. 하지만 투자를 하려면 늘 대중과 반대의 결정을 내려야 하고, 사업을 하려면 겨울에 밀짚모자 재고를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이 두렵고 성가신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통계에는 그런 성향의 사람들이 80%가 넘는 것으로 나와 있기도 하다.
 
혹시 요즘 세태의 영향으로 갑자기 생각이 바뀌어 다시 노후에 일을 할 생각이라면 준비는 잘 해야 한다. 우선 새로운 접촉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나의 자본과 지식의 통제력을 키우고, 스스로의 행동과 결정력의 적정한 규모를 정해야 한다. 이를 두고 노후의 자기집행력(managerial self-capacity)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은 아무리 사회적 돌봄이 있는 세상이라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냉엄한 자기 집행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엄길청 global analyst & futur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