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길청 칼럼] 실질주의의 냉정한 음미
[엄길청 칼럼] 실질주의의 냉정한 음미
  • 승인 2018.05.25 08: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비즈트리뷴]에라스무스, 루소, 괴테를 비롯하여 하이데거, 톨스토이, 사르트르 등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행복과 존재와 가치에 대한 옹호론적 인식은 물질과 기술의 진보 속에서도 우늘까지 인문주의(humanism)의 기본이 되어 인간의 정신적이고 지성적인 삶을 지탱해주고 있다. 14-15세기의 르네상스도 이런 배경을 가지고 등장하였고, 유럽의 시민계급의 형성과도 깊은 관련성을 지닌다. 후일의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등의 근대적 정치사조에서도 인간의 소망과 인간중심의 인성가치 존중은 그 사상과 이념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실질주의(practicism)가 언제나 이 인문주의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다. 형식이나 관례에 얽매이지 않고, 실제의 내용이나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적인 이익이나 효과를 기조로 하여 판단하고 행동하는 가치가 바로 그것이다. 흔히 사람 나고 돈 났다라고 하는 것이 인문주의적 관점이라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면 이는 실질주의적 소견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일자리를 만든다는 정부의 주장은 인문주의적 시책이라면, 스마트공장을 늘리고 스타트업을 키운다면 이는 실질주의적 접근이다. 그런데 이 둘을 다 동시에 시행한다면 이는 매우 가치중립적인 정치행동관이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매우 실질주의적 정치철학을 가지고 있어서 그의 정치수사를 듣다보면 마치 저자거리의 흥정이나 협상을 방불케 한다. 사실 이제까지의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의 체제 보호적 외교전술도 실질주의적 접근이 그 근간을 이룬다. 그래서 이런 두 정치인의 외교현장이나 협상에는 진정성이나 믿음이나 인간적 교류가 아닌 목적과 효과의 수단과 기술들이 그 주변을 풍미하게 된다.

그 어느 시기보다 시민들의 의식과 역할이 크게 고양된 우리 사회는 지금 인문적 가치관들이 사회적 현실의 압박을 이겨내며 많이 자라나고 있으며, 특히 대통령을 비롯한 현재의 정치지도자들이 대체로 인문가치의 실천과 실행에 시대운영의 의미를 크게 두는 편이다. 그런 경향을 바탕으로 작금의 한반도 상황을 현재의 우리 정부가 중재하고 조정하는 일은 많은 좌절과 당혹감을 안겨줄 것이 자명하다. 그렇다고 인문적 가치로 보자면 이를 쉽게 포기하거나 실망하여 그냥 돌아설 일은 더욱 아니라고 생각하게 때문에 그 여정이 고단하거나 난관의 연속일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개인들의 미래 준비나 현실의 대처를 보아도 시대를 보고 대응하는 대중들의 삶의 처신이 엄청난 간극을 보이고 있다. 특히 이제 종전의 노후라는 의미의 은퇴자들은 두 가지의 다른 여생의 태도를 보이는 편이다, 한쪽은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 안의 나를 찾아 진정한 마음의 행복을 찾을 것이란 결심을 세운다. 그런 분들은 자신이 미리 들어 놓은 연금이나 작은 상가의 월세를 굳게  믿는 편이다. 또 일정한 입장에 있는 분들은 정치인들이 주장하는 사회복지나 사회보장 정책에 마음을 많이 기대고 산다. 

하지만 또 다른 대중들 사이에는 미래나 현실의 매사를 자신이 감당하고 대처해야 한다는 소신으로 그 힘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는 돈을 벌거나 가족을 규합하거나 일을 지탱하는데 열심을 다 한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 이 두 간극은 많이 멀어져 있으며, 앞으로도 더욱 그럴 것으로 보인다. 마음이 행복한 여생을 계획하는 분들은 요즘처럼 대중상품과 공공서비스가  편리하고 사회 안정이 받쳐주는 세상에서 큰 돈 들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많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점점 심각해지는 청년실업이나 장수사회의 등장을 앞에 두고, 미래 삶의 자신의 대비책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 여기서 뭐 하나라도 더 모아두고 챙겨두고 익히고 얻어야 한다는 생각을 쉽사리 던지지 못하고 산다.

인생이나 사회를 보는 시각은 대개 자신도 잘 모르는 자신만의 내면적 성향이나 취향에서 비롯된다. 내가 생각하는 시야에서만 진실을 판단하고 구분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면에서 세상을 현실적으로 주도하는 사람들 중에는 실질주의자가 많다. 주식을 많이 가진 사람들은 매일 사고팔지도 않지만, 설령 어쩌다 돈을 잃어도 크게 실망하지 않는다, 땅이 많은 사람은 매일 부동산 시세를 보지도 않지만 매매도 자주 하지 않는다, 한번 결정하고 승부에 들어가면 오래 기다리고 버티고 심지어 물 타기도 한다. 그리고 반드시 결과를 본다, 그러나 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기대와 예상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여 자신의 결정으로부터 사회에서 다른 반응이 나오면 실망하거나 상처가 크다. 갑자기 자연을 찾아가는 분들의 뒷모습에서 보기 쉬운 소감들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 새로운 문명의 운동장은 그 기울기가 심각하게 기울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ICT의 기반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혁신주도자들은 이미 미래의 권력을 만들고 있고, 중산층들이라 불리던 사람들은 점점 사회적 해법이나 정치적 대안으로 기울고 있다. 그 사이에 등장하는 단어가 Plutonomy란 단어이다. 금권주의란 단어인데, 중국의 실제의 외부적 힘은 그들의 16억 인구가 아니라 많은 외환보유고이다. 미국 가장 힘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세계 상품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구매력이다. 그런데 하나는 스톡(stock)이고 하나는 프로우(flow)이다.

모아 둔 힘은 일정하게 쓰면 사라지지만, 늘 창조하고 생성하는 힘은 늘 새롭게 생겨나게 된다. 아마도 북한이 핵 실험장을 폭파한 것은 그동안 모아둔 힘을 버린다는 의미이며, 실제는 관련 과학지식은 학자들의 머릿속이나 실험연구 시스템에서 시뮬레이션으로 계속 흐르고 있을 것이다. 중국이 미국에게 당하는 무역압력은 그동안 미국서 벌어서 모아둔 국제수지 흑자 분을 어서 쓰라는 외압이다. 우리 역시 미국서 본다면 같은 선상의 국가이다.  

미리 모아둔 미래의 쓸 돈은 언제나 지금 더 쓰라는 많은 현실의 압박을 받게 된다. 그러나 지금 활동해서 들어오는 수입은 규모가 작아도 늘 내가 새롭게 행동하고 결정해서 얻은 결과물이다. 사업을 하거나 주식이나 자산을 투자를 하면서 분명히 얻고 쌓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일에 대한 긍정과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그들이 주로 실질주의자들이다.
 
[엄길청/global analyst & futur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