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노트-이제 다시 경제③] SK·삼성 이어 현대차…'공공의 적' 시선으론 투기자본만 배불린다
[재계노트-이제 다시 경제③] SK·삼성 이어 현대차…'공공의 적' 시선으론 투기자본만 배불린다
  • 이연춘
  • 승인 2018.05.24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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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SK·2015년 삼성 이어 현대차까지…경영권 방어 '엘리엇 방지법' 추진

'경영의 낭비'. '규제의 족쇄'. 최근 재계 곳곳에서 이런 목소리는 자주 들려온다.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재벌개혁, 이에 따른 반기업 정서의 확산, 정권 따라 손바닥 뒤집는 정책까지. 경영의 불확실성은 더 높아지고 있다. 적폐청산에는 공감하나, 연착륙은 중요하다. 정치적 잣대로 기업과 시장을 바라봐서는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될 리 만무하다. 한국은 글로벌 시장을 놓고 볼때 '가장 기업하기 힘든 나라'라는 경영·경제학자의 지적은 차고 넘친다. 기업의 경영시계가 멈춘 후에, 기업이 보따리를 싼 후에 후회하면 늦는다. 양질의 일자리는 기업에서 나온다. 이제 다시 경제를 생각해야 할 때다. <편집자 주>

 

[비즈트리뷴=이연춘·강필성 기자] 재계가 정부의 대기업 지배구조 개편 정책에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정부가 재벌 구조개혁과 맞물리며 엘리엇 등 헤지펀드 행보가 본격화 됐기 때문이다.

돌아온 엘리엇에 기업들이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그 파장이 단기가 아닌 중장기에 미치고 심지어 기업 자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주주로서의 권리를 내세우곤 했지만 실제로는 막대한 차익만 챙기고 '먹튀'한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평가다.

24일 재계에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돼온 재벌개혁 정책이 결과적으로 헤지펀드에 먹잇감을 제공해온 셈이라고 지적한다. 지금은 오히려 포이즌필이나 차등의결권 등 경영권 보호 장치를 도입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 

하지만 정부의 기조는 반대로 흐르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현재 상법 개정안을 통해 집중투표제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미 국민연금은 의결권 행사지침에 집중투표제 시행 근거를 신설한 상황. 

집중투표제는 이사를 선임할 때 1주당 이사의 수만큼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소액주주의 권한이 강해지는 만큼 상대적으로 지분보다 많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헤지펀드에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최근 잇따라 헤지펀드의 공격을 받는 기업 입장에서는 부담요인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

◆ 엘리엇 등장으로 무산된 현대차 지배구조 개편

단적으로 최근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안은 엘리엇의 등장으로 사실상 좌초 상태다. 엘리엇이 현대차그룹의 지분을 매집하고 나서면서 현대모비스 중심의 지배구조 개편이 아닌, 현대차 중심의 지주회사 전환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후 글로벌 의결권자문사가 앞 다퉈 현대모비스의 지배구조 개편안 관련 주주총회에 반대 권고를 내리면서 결국 주총 자체가 무산됐다. 지배구조 개편안 발표 당시만 하더라도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순환출자 해소 노력을 극찬하고 나섰던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 결과다. 심지어 현대차그룹은 이번 지배구조 개편안과 관련 파격적인 자사주매입 등의 주주친화 정책을 발표한 바 있다.

업계에서는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안이 무산되는 과정에 엘리엇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대기업 관계자는 “엘리엇이 현대차그룹에 보유한 주요 계열사 지분은 1~2% 수준이지만 외국계 주주와 엘리엇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드리는 해외 의결권 자문사 등으로 인해 실제 영향력은 더 크다고 평가되고 있다”며 “이대로라면 현대차그룹은 물론 일반 주주의 피해도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런 사례는 비단 현대차그룹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국내 기업을 상대로 한 헤지펀드의 공세는 지난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9년 타이거펀드의 SK텔레콤 공격, 2003년 소버린자산운용의 SK 공격, 2003년 헤르메스의 삼성물산 공격, 2005년 칼 아이칸의 KT&G 공격, 2015년 엘리엇의 삼성 공격 등 글로벌 투기자본들은 수시로 국내 대표기업에 대한 공격을 단행했고 막대한 이익을 챙겨갔다. 

최근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지배구조 압박이 되풀이 되는 상황이 헤지펀드에게 있어서는 최적의 먹잇감이었다. 이는 정부 차원에서도 적잖은 부담이다.

실제 엘리엇은 최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과정에 한국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며 7000억원 규모 투자자-국가간 소송(ISD)을 제기한 바 있다. ISD는 외국인 투자자(기업)가 투자국 정부 정책으로 손해를 봤다고 판단할 때 상대 국가를 상대로 직접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제도다.

법무부에 따르면 엘리엇은 중재의향서에서 합병으로 인한 피해액이 6억7000만 달러(한화 약 7182억원)에 달했다. 지난달 13일 엘리엇이 한국 정부에 중재의향서를 접수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 국제중재업계 등에서 추정한 피해 금액의 최대치에 가까운 것이다. 

 

엘리엇은 "(삼성물산 합병 결정은) 한국인 투자자 집단에 특혜를 주고 엘리엇과 같이 환영받지 못하는 외국인 투자자에게는 피해를 주기 위해 차별적, 독단적이고 불투명한 의도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며 "부패 환경과 엘리엇에 대한 편견이 아니었다면 합병은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실 엘리엇은 삼성그룹에 대한 공격 과정에서 최소 4000억원에 달하는 차익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 투기자본의 국내기업 공격이 거세지면서 경영권 방어장치 마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기업이 자발적으로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과정에서 일부 행동주의 펀드의 경영간섭과 경영권 위협이 반복되고 있는 상황에 선진국 수준의 경영권 방어수단 도입이 시급하다고 것. 

대기업 한 임원은 "삼성·현대차가 엘리엇 도마에 오르는 등 글로벌 투기자본의 한국 기업 사냥이 본격화했지만 정작 기업들이 이를 방어할 최소한의 카드조차 없다"며 "현대차 사태를 계기로 경영권 방어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련법 논의' 수년째 제자리…기업하기 힘겨운 韓

다만 관련 법 개정은 '오너 일가에 대한 특혜'라는 반(反)기업 정서와 정치권의 반대 속에 수년째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재벌개혁의 일환으로 추진하는 기업 지배구조 개편, 주주권 강화 등의 경제민주화 법안과 맞물려 이 틈을 노린 해외 자본의 공세가 더욱 거세질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대 국회 개원 이후 올해 3월 말까지 발의된 기업 지배구조 관련 상법 개정안(20건) 가운데 경영권 제한 조치를 담은 개정안은 18건인 반면 경영권 보호 장치에 초점을 둔 발의안은 2건에 불과하다.

시장 전문가들은 경영권 방어를 위한 제도 도입도 필요하지만 기업들도 기형적 지배 구조 해소, 적극적 주주 환원 정책 등을 통해 투기 자본 공격의 빌미를 없애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문제는 앞선 삼성전자나 현대차말고도 많은 국내 기업들이 엘리엇 같은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다는 사실이다.  

재계 관계자는 "취약한 지배구조로 헤지펀드의 공격 대상으로 지목받아 온 현대기아차지만 엘리엇의 재등장은 최근 정부가 속도를 내고 있는 재벌 구조개혁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 각계의 공통된 견해"라며 "재벌 개혁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상황을 틈타 헤지펀드들에게는 뛰어놀 운동장이 마련 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관계자는 "구조개혁의 고삐를 느슨히 해서도 안 되지만 자칫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기는 꼴이 될수 있다"며 "최근 흐름에 편승한 헤지펀드들에게 또 다른 빌미를 제공하는 것은 아닌 지 세밀한 점검과 대응을 되짚어봐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