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숨에 읽는 기업사上] 창립 56주년 남양유업 발자취
[단숨에 읽는 기업사上] 창립 56주년 남양유업 발자취
  • 박진형 기자
  • 승인 2020.03.14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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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3월 13일, 남양유업이 설립된 날이다. 이광범 대표는 창립 56주년을 맞아 "언제나 고객의 곁에서 기업의 책임을 완수하고 동행의 가치를 실천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 땅에 굶는 아기들이 없게 하겠다'는 창업주의 신념과도 묘하게 오버랩된다. 창업주는 일본산 분유로 아이들을 키울 수 없다며 충남 천안에 공장을 세웠다. 북한보다 훨씬 못 살았던 남한의 보릿고개 시절, 남양유업의 탄생일, 64년도로 잠시 시곗바늘을 돌려보자.

◆1960s 창업기=1950년대~60년대초 초등학교를 다녔던 사람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다. 점심시간에 도시락 뚜껑에다가 배급받아 우유처럼 먹던 전지분유. 미국의 구호물자로 보급된 이 전지분유가 우리나라 유제품의 시작이었다. 

당시 유아용 분유라고는 일본의 모리나가 회사가 제조한 수입 분유가 유일했다. 가격도 비싸 일반인들은 사기도 어려웠다. "분유는 금유(金乳)"라고 불렸을 정도로 '귀하신 몸'이었다. 집에 분유 살 돈이 없어서 쌀뜨물을 먹고 자라는 아이들이 많았다. 수입분유는 우리나라 아기들의 체질과 맞지 않아 탈이 나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홍두영 남양유업 창업주

무역상을 하던 고 홍두영 남양유업 창업주는 이런 현실을 보며 '우리 아이들에게 국내에서 만든 분유를 먹이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의 신념은 1964년 3월 13일 '남양유업'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듬해 11월에는 충남 천안에 제1공장을 지었다.

설비를 갖춘다고 제품이 뚝딱 만들어 지는 건 아니다. 기술이 필요했다. 한국은 낙농업 불모지였기 때문에 덴마크 등 해외로부터 기술을 들여왔다. 3년간의 노력 끝에 1967년 1월 '남양분유'가 탄생했다. 순수 우리 기술로 만들었다. 국내 조제분유 업계 중에서 처음으로 이룬 쾌거다. 시장에선 '남양분유'가 일본 모리나가 회사가 만든 분유와 품질이 유사하다며 호평을 받았다. 다만 분유는 소비성향이 쉽게 변하지 않아 수요층을 개척하려면 상당기간 걸린다는 전망이 나왔다. 

국내 분유 중에선 '서울분유'(1965년 출시), 외제 분유에선 '메디락'이 가장 인기였다. 남양분유는 점점 격차를 좁혀나갔다. 1969년 한국부인회가 전국 회원 2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분유소비율은 서울분유 47%, 남양분유 32%로 나타났다. 특히 전라북도와 충청북도 지역에선 남양분유가 서울분유를 앞질렀다.

◆1970s 성장기반 구축기=남양유업은 1971년 국내 최초로 특수조제분유인 '남양분유 A'를 선보였다. 유청 단백질을 강화하고 카제인 비율을 줄였다는데 결론은 모유의 단백질과 유사하게 만들었다는 게 핵심이다. '어머니의 젖과 꼭 같은 새로운 분유'라는 신문 광고를 내기도 했다. 이후 '남양분유S'(1978년), '남양분유Sa'(1979년) 등을 연달아 출시했다. 1979년 남양유업의 국내 분유시장 점유율은 65%선이다.

이 같은 성장배경에는 남양유업의 '우량아 선발대회'를 빼놓을 수 없다. 남양유업은 1971년 '제1회 전국우량아 선발대회'를 개최했다. 전국에 생중계 되면서 회사 네임벨류를 키웠다. 당시 사회적으로 마땅한 이벤트나 행사가 없었던 탓도 있지만, 아이를 살찌우는 게 소원이었던 60~70년대 부모의 마음을 사로잡은 게 주효했다. 첫 대회에는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참가할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다. 1회 전국 최우량아는 춘천에 사는 한영만 아기(69년 11월생)다. 키 85㎝, 몸무게 13㎏, 머리둘레 50㎝ 등 발육상태가 좋았다. 이때 이후로 '분유를 먹어야 튼튼해진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우량아 선발대회는 1984년 제31회까지 열렸다.

유산균 발효유 '남양 요구르트'도 출시해 히트시켰다. 1977년의 일이다. 당시 1일 요구르트 수요가 300만병에 달하며 시장이 커지자 이 분야에 새롭게 뛰어들었다. 훗날 자사의 대표 발효유 브랜드인 '불가리스' 개발의 발판이 됐다. 남양유업이 발효유 시장에 출사표를 던짐에 따라 기존의 요구르트 메이커인 한국야구르트와 해태유업을 포함해 대일유업(현재 빙그레), 서울우유협동조합까지 가세하면서 5파전이 형성됐다.

1967년 순수 국내 기술로 생산한 남양분유/사진=남양유업
1967년 순수 국내 기술로 생산한 남양분유/사진=남양유업

남양유업은 1978년 6월 유업계 최초로 기업공개를 통해 주식을 발행했다. 1주당 액면가 500원에 총 250만주가 증권시장에 상장됐다. 이후 활발한 영업활동을 보이면서 업계에 주목을 받았다. 상반기 기준으로 분유 60억, 요구르트 9억 등 총 82억원의 매출실적으로 지난해에 비해 1.6배의 신장을 보였다.

◆1980s 사세 확장기=남양유업은 1980년 2월 분유, 요구르트, 우유 등 늘어나는 유제품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총 50억원을 투입해 충남 공주에 제2공장을 건설했다. 대지면적 3만평, 건축면적 3000평 규모다. 이번 공장 증설로 월 분유 생산량은 약 200만캔 규모에서 550만캔으로 2배 넘게 증가하게 됐다. 이번 공장 증설에 따라 분유의 고급화에 더욱 주력할 방침을 세웠다.

지속적인 연구개발을 통해 82년에 성장기 어린이용 조제분유 '점프'를 출시했다. 9개월 이후 유아나, 2~3세까지 성장단계에 있는 어린이에게 알맞은 제품이다. 철분, 칼슘, 단백질 등 영양분이 강화된 게 특징이다. 80년대 후반 매일유업의 '맘마' 제품과 치열한 광고전을 펼치기도 했다. '점프A는 영양 균형, 맘마는 칼슘 과다'라는 내용의 광고가 논란을 일으켰다. '점프A의 시장점유율 79.88%'라는 선전도 경쟁사의 공격 대상이 됐다.

사진=남양유업

남양유업은 식품업계의 사각지대로 남아있던 이유식 시장에도 뛰어들었다. 1985년 남양이유밀 시판에 나섰다. 버섯과 쇠고기, 우유, 쌀, 콩, 당근, 시금치, 달걀 등 8가지 영양식품을 주원료로 만든 제품이다. 동생 회사였던 남양산업이 부도로 은행관리에 들어가면서 공급 공백을 채웠다. 당시 남양산업의 시장 점유율은 60%에 육박했지만, 형 회사의 '어택'에 따라 50% 이하로 떨어졌다. 형과 동생 사이에 금이 가게 된 계기가 됐다.

남양유업은 1988년에 '도투락우유'를 판매하던 (주)도투락의 경주 공장(2300평 규모)을 49억원에 인수해 업계 판도를 뒤흔들었다. 물량면에서 매일유업, 해태유업을 제치고 유가공업계 2위로 치고 올라선 것. 설비 확장을 통해 1일 시유(우유) 75만개, 요구르트 60만개, 유산균음료 6만개의 생산능력을 갖추게 됐다.

분유, 발효유, 이유식에 이어 1989년엔 공주 제2공장 등에 설비를 갖추고 슬라이스치즈 '로젠하임'을 출시했다. 젊은층의 입맛이 서구화되면서 '서양의 된장'이라 불리는 치즈 수요가 증가하던 시기였다. 치즈를 넣은 햄버거, 샌드위치가 간식으로 인기만점이었다. 롯데리아, 버거킹은 번창했다. 치즈소비량은 1986년 679t에서 1987년 1600t으로 껑충 뛰었다. 치즈전쟁의 전운은 2년 전에 감돌았다. 해태유업이 1987년 슬라이스치즈를 개발해 인기를 끌자 서울우유 등 업체들이 잇따라 진출하면서 경쟁이 치열해졌다.

 

[비즈트리뷴=박진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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