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의 김기춘 '문화계 블랙리스트' 파기환송...조국 재판에 영향주나
대법의 김기춘 '문화계 블랙리스트' 파기환송...조국 재판에 영향주나
  • 윤소진 기자
  • 승인 2020.01.31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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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대법원
/사진=대법원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30일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알려진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의 상고심에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내 다시 심리하라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이날 김 전 실장 등의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 지원배제 행위가 ‘직권남용’에는 해당하지만,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직권남용죄)가 성립하려면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해당해야 한다며, 그 의미와 범위를 판단하는 데 보다 엄격한 기준을 새로이 제시했다.

특히 ‘사법농단’과 ‘국정농단’, ‘유재수 감찰 무마’와 ‘조국 일가’ 의혹 등 권력형 비리가 얽힌 굵직굵직한 사건에는 거의 직권남용 혐의가 적용돼있어, 현재 동일한 공소사실이 적용돼 진행 중인 또는 예정된 하급심 재판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이번 판결에 관심이 집중됐다.

◆ 조국 ‘감찰 무마’·양승태 ‘사법농단’ 재판에 영향주나 

대법원의 전원합의체는 통상 기존의 대법원 판례를 변경할 필요가 있을 때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 판결을 위해 열린다. 이에 최근 이목이 집중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감찰무마 의혹' 재판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대법원이 직권남용죄의 판단기준을 엄격히 해석하면 범죄성립이 어렵게 되고, 동일한 혐의를 받는 피고인은 재판에서 유리해질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조 전 장관 측 변호인들이 직권남용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한 이유 중의 하나가 특감반원이 감찰을 계속할 권한이나 의무가 없다는 것이었다. 민정수석의 지시에 따라서 단순 보조원으로서 행위를 한 것이므로 직권남용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고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재직 당시 일제 강제노역 피해자 소송 등 재판에 부당하게 개입하고, 판사 사찰과 인사 불이익 명단 작성을 지시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마찬가지로 이번 판결로 인해 양 전 대법원장의 지시를 받은 판사들의 직무 범위와 관련 법령과 절차 위반 여부 등이 재판의 쟁점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일각에서는 현재 권력형 비리 의혹으로 줄줄이 법정에 선 피고인들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한 방향에 서 있는 이번 판결의 내용이 다소 아쉽다는 의견도 나왔다. 급증하는 권력형 비리 사건에 보다 강력한 제재와 명확한 기준을 제시해 주길 바라는 기대감이 컸다는 이유에서다.

이러한 우려에도 한 법조계 인사는 “대법원의 파기환송이 반드시 무죄 취지의 판결이라고 할 수 없는 만큼, 직권남용 혐의 등으로 법정에 선 피고인들이 이번 판결로 무죄선고를 받을 수 있을지는 섣불리 예단하기 어려운 일이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이어 “이번 판결에서 그 범위와 기준이 구체적으로 명확히 제시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각각의 재판에서 법리 다툼이 치열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사안별로 다르겠지만 이번 대법원 다수의견의 취지는 ‘의무 없는 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인정되면 ‘직권 남용행위’더라도 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것이 핵심”이라고 답했다.

◆ 김기춘 ‘문화계 블랙리스트’ 지원배제...‘직권남용’은 맞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왼쪽),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사진=연합뉴스 제공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왼쪽),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사진=연합뉴스 제공

앞서 김 전 실장 등은 박근혜 정부 시절 정부에 비판적인 단체나 예술가 등의 이름과 배제 사유 등을 정리한 문건,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하도록 지시하고, 리스트에 올라가면 정부 지원 대상에서 배제하도록 한 혐의로 기소됐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김 전 실장이 블랙리스트 지원배제 등을 지시한 것은 ‘직권남용’에는 해당한다고 판단하고 원심에서 유죄로 인정한 일부 행위의 직권남용죄도 성립한다고 봤다.

‘직권남용’이란 공무원이 일반적 직무권한에 속하는 사항에 관해 그 권한을 위법·부당하게 행사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남용에 해당하는지 판단하는 기준은 공무원의 직무 행위가 법에서 부여한 목적에 따른 것인지, 직권 행사가 허용되는 법령상의 요건을 충족했는지 등을 종합해서 판단하게 된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다수의견은 “김 전 실장이 당시 대통령 뜻에 따라 문화예술진흥기금 등 정부 지원을 신청한 개인·단체의 이념적 성향이나 정치적 견해 등을 이유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ㆍ영화진흥위원회ㆍ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하 각각 ‘예술위’, ‘영진위’, ‘출판진흥원’이라 함)이 수행한 각종 사업에서 좌파 등에 대한 지원배제, 예술위 책임심의위원 선정과정 개입을 지시한 것은 직권남용죄에서 말하는 직권을 남용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 ‘직권남용’ 맞아도 ‘의무 없는 일’에 해당해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는 공무원이 일반적인 직무권한에 속하는 사항에 관해 직권을 행사하는 모습으로 실질적, 구체적으로 위법·부당한 행위를 한 경우에 성립한다.

기존의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직권남용죄’는 단순히 공무원이 ‘직권 남용행위’를 한 것만으로 곧바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직권을 남용해 현실적으로 다른 사람이 법령상 의무 없는 일을 하게 만들거나, 직권 남용행위로 인해 다른 사람의 구체적인 권리의 행사를 방해하는 결과가 발생해야 한다.

이번 전합 다수의견은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것’과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것’은 제123조가 규정하고 있는 객관적 구성요건요소인 ‘결과’로서 둘 중 어느 하나가 충족되면 직권남용죄가 성립한다”면서 “이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와 구별되는 별개의 범죄성립요건이다”고 설명했다.

이어 “공무원의 행위가 직권남용에 해당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상대방이 한 일이 ‘의무 없는 일’에 해당한다고 인정할 수 없다”며 “의무 없는 일에 해당하는지는 직권을 남용했는지와 별도로 상대방이 그러한 일을 할 법령상 의무가 있는지를 살펴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직권 남용행위가 위법이라는 이유로 그에 따른 행위가 곧 의무 없는 일이 된다고 인정하면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라는 범죄성립요건의 독자성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고,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의 경우와 비교해도 형평에 어긋나게 된다”고 덧붙였다.

또한 ‘의무 없는 일’의 의미에 대해서도 행위의 상대방에 따라 판단하는 근거와 기준을 달리하는 등 범죄의 성립에 더 엄격한 기준을 내세웠다.

◆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공무원인 경우 구분해야

대법원은 직권 남용행위로 의무 없는 일을 하게 되는 상대방이 일반 사인(私人)이 아닌 공무원이거나 법령에 따라 일정한 공적 임무를 부여받고 있는 공공기관 등의 임직원인 경우에는 관계 법령 등의 내용에 따라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행정조직이 날로 복잡, 다양해지고 전문화되는 현대사회에 발맞춰 합리적인 운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합 다수의견은 “행정기관의 의사결정과 집행은 다양한 준비과정과 검토 및 다른 공무원, 부서 또는 유관기관 등과의 협조를 거쳐 이루어지는 것이 통상적이다”며 “이러한 협조 또는 의견교환 등은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필요하고, 동등한 지위 사이뿐만 아니라 상하기관 사이, 감독기관과 피감독기관 사이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러한 관계에서 일방이 상대방의 요청을 청취하고 자신의 의견을 밝히거나 협조하는 등의 요청에 응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법령상 의무 없는 일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했다.

따라서 이번 판례에 따르면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어떠한 일을 하게 한 때 그 상대방이 공무원이나 유관기관의 임직원인 경우에는 그 일의 형식과 내용이 직무 범위에 속하는 사항이고 적법절차에 의하면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권리남용’에 해당하더라도 권리행사방해죄가 성립한다고 보기 어렵게 됐다.

전합 다수의견은 “김 전 실장 등이 직권남용 행위로 예술위·영진위·출판진흥원 직원들에게 지원배제 방침이 관철될 때까지 사업진행 절차를 중단하는 행위, 지원배제 대상자에게 불리한 사정을 부각시켜 심의위원에게 전달하는 행위 등을 하게 한 것은 직권남용죄에서 말하는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반면 “위 직원들이 문체부에 각종 명단을 송부하는 행위, 공모사업 진행 중 수시로 심의 진행 상황을 보고하는 행위를 하게 한 것에 대해서는 원심이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해당하는지 판단하지 않은 잘못이 있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 예술위·영진위·출판진흥원 직원들의 명단 송부·사업 진행 보고 행위가 ▲종전에도 업무협조나 의견 교환 차원에서 있었던 것인지 ▲행위의 근거는 무엇인지 ▲각 행위가 종전 행위와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등을 살펴 법령 등의 위반 여부를 심리해야 한다고 봤다.

이러한 전합 다수의견에 대해 피고인들의 지원배제 지시가 직권남용 행위로 단정하기도 어렵다는 취지의 대법관 박상옥의 별개의견, 이른바 ‘청와대 문건’의 증거능력과 그로 파생된 2차적 증거들의 증거능력이 없다는 취지의 대법관 조희대의 별개의견, 피고인들의 문체부 공무원을 통한  예술위ㆍ영진위ㆍ출판진흥원 직원들에 대한 지원배제 지시와 일부 피고인들의 문체부 1급 공무원 등에 대한 사직 요구는 강요죄에서 말하는 협박에 해당한다는 취지의 의견도 있었다.

현행 형법 제123조(직권남용)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김 전 실장은 1심에서 지원배제 혐의에 대해서만 유죄가 인정돼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2심에서는 1급 공무원에게 사직을 강요한 혐의가 추가돼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조 전 수석은 1심에서 국회 위증 혐의만 유죄인정을 받고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어진 2심에서 지원배제에 관여한 행위가 일부 유죄로 인정되면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대법원은 2018년 7월 사건을 전원합의체로 넘겨받아 심리를 진행해 1년 6개월간 만에 원심의 유죄 판단 부분 중 일부 법리 오해와 심리미진이 있음을 이유로 30일 파기환송 판결을 내렸다.

향후 이어질 환송심에서 엄격해진 직권남용 인정 요건으로 인해 김 전 실장 등의 감형이 이뤄질 지 재판 결과에 귀추가 주목된다.

[비즈트리뷴=윤소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