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경 명예회장 별세 ③] 경영인 인생의 모범을 보여준 재계의 큰 어른
[구자경 명예회장 별세 ③] 경영인 인생의 모범을 보여준 재계의 큰 어른
  • 이서련 기자
  • 승인 2019.12.14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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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경 명예회장의 75세 생일에서 가족사진

구자경 명예회장은 재계의 큰 어른으로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LG를 이끈 경영인으로서 보여준 성과뿐만 아니라 재계에서는 처음으로 스스로 회장직을 후진에게 물려주어 대한민국 기업사에 성숙한 후계 승계의 모범 사례를 제시했다.

또 인재양성을 위한 사회 공익활동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스스로는 경영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 대신 자연을 벗삼아 간소한 여생을 보내며 은퇴한 경영인으로서의 삶으로도 재계에 귀감이 되며, 사회의 존경을 받았다.

재계 첫 무고(無故) 승계 단행, 창업세대 원로 경영진과 동반 퇴진하며 세대교체 이뤄 재계에 귀감

구자경 명예회장은 1995년 2월, LG와 고락을 함께 한 지 45년, 회장으로서 25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스스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는 국내 최초의 대기업 ‘무고(無故) 승계’로 기록되며 재계에 신선한 파장을 일으켰다.

아직 은퇴를 거론할 나이가 아닌 시기에 그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경영혁신의 일환으로 경영진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결심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는 당시 WTO체제의 출범 등 본격적인 무한경쟁시대를 맞아 글로벌화를 이끌고 미래 유망사업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젊고 도전적인 사람들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이들이 주도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었다.

구 명예회장은 퇴임에 앞서 사장단에게 “그간 혁신을 성공시킬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노력을 충실히 해 왔고 그것으로 나의 소임을 다했으며, 이제부터는 젊은 세대가 그룹을 맡아서 이끌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퇴임 의사를 표명했다.

1995년 2월 회장 이·취임식장에서 구 명예회장은 “돌이켜 보면 행운보다는 고통이, 순탄보다는 고난이 더 많았던 세월이었지만, 임직원들의 헌신적인 노고가 늘 곁에 있었기에 용기와 신념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특히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경영혁신에 자발적으로 동참해 준 임직원들의 저력과 노고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명과 감사로 간직하게 될 것”이라며,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이 시점에서 여러분을 믿고 나의 역할을 마치고자 한다. 이제 공인의 위치에서 평범한 자연인으로 돌아가게 되니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나 싶어서 무상감도 들지만, 젊은 경영자들과 10만 임직원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기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의 자리를 넘기고자 한다”고 말했다.

구 명예회장은 감회 어린 이임사를 끝으로 임직원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식장을 빠져 나갔다. 경영일선에서 물러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구 명예회장이 회장에서 물러날 때 창업 때부터 그룹 발전에 공헌을 해 온 허준구 LG전선 회장, 구태회 고문, 구평회 LG상사 회장, 허신구 LG석유화학 회장, 구두회 호남정유에너지 회장 등 창업세대 원로 회장단도 젊은 경영인들이 소신 있게 경영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동반퇴진’을 단행했고, 이러한 모습은 당시 재계에 큰 귀감이 되었다.

구 명예회장은 은퇴를 결심하면서 ‘멋진’ 은퇴보다는 ‘잘 된’ 은퇴가 되기를 기대했다. 육상 계주에서 앞선 주자가 최선을 다해 달린 후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배턴 터치가 이루어졌을 때 ‘잘 됐다’는 표현이 어울리듯, 경영 승계도 마찬가지라 생각했던 것이다.

구 명예회장에게 은퇴는 그가 추진해 온 경영혁신의 일환이었고, 본인 스스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혁신 활동이었다. 그는 훗날 회고에서 “은퇴에 대한 결심은 이미 1987년 경영혁신을 주도하면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경영 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차기 회장에게 인계한다는 것이 경영권 승계에 대한 내 나름의 밑그림이었다. 그래서 내 필생의 업으로 경영혁신을 생각하게 되었고, 혁신의 대미로서 나의 은퇴를 생각했던 것이다”라고 밝혔다.

후에 구 명예회장은 지인들에게 당시 은퇴할 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섣달을 보내며 나름의 감회를 지니게 되지만 내게는 각별히 다른 의미가 하나 더해진다. 선친의 기일 역시 섣달 그믐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4년의 섣달그믐만큼은 참으로 홀가분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었다. 이때는 이미 마음속의 은퇴를 결심했기 때문이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 57년간 이어온 구·허 양가의 동업관계 정리도 ‘아름다운 이별’로 한 치의 잡음 없이 마무리

구자경 명예회장이 퇴임 후 2000년대 들어 3대 57년간 이어온 구·허 양가의 동업도 ‘아름다운 이별’로 마무리했다.

57년간 사소한 불협화음 하나 없이 일궈온 구씨, 허씨 양가의 동업관계는 재계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사업매각이나 합작, 국내 대기업 최초의 지주회사 체제 전환 등 모든 위기 극복과 그룹 차원의 주요 경영 사안은 양가 합의를 통해 잡음 없이 이뤄졌다.

양가는 기업의 57년의 관계를 아름답게 매듭짓는 LG와 GS그룹의 계열분리 과정 또한 합리적이고 순조롭게 진행했다. 구 명예회장 직계가족은 전자, 화학, 통신 및 서비스 부문 맡아 LG그룹으로 남기기로 했고, 허씨 집안은 GS그룹을 설립해 정유와 유통, 홈쇼핑, 건설 분야를 맡기로 했다. 또 전선과 산전, 동제련 등을 묶어 구태회, 구평회, 구두회 창업고문이 LS그룹을 공동 경영하기로 했다.

순탄하게 계열 분리가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한번 사귀면 헤어지지 말고 부득이 헤어지더라도 적이 되지 말라"는 창업회장의 뜻을 받들어 구 명예회장이 합리적인 원칙에 바탕을 둔 인화의 경영을 철저히 지켰고, 상호 신뢰와 의리를 바탕으로 사업을 이끌어 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구자경 명예회장(가운데)이 연암대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교내를 산책하고 있다

교수 해외연구, 학교설립과 전자도서관, 청소년을 위한 과학관 등 인재 양성에 각별한 열의

구자경 명예회장은 사회 생활의 첫 발을 교직에서 시작했었다. 젊어서는 교사로 우리나라를 이끌어 갈 재목을 길러내고, 노년에는 자연을 가까이 하며 농장을 가꾸는 것이 그가 원래 꿈꿨던 삶의 모습이었다.

훗날 퇴임 후 “내가 가업을 잇지 않았다면 교직에서 정년을 맞은 후 지금쯤 반듯한 농장주가 돼있지 않았을까”하고 말하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은 회장으로 재임하면서도 교육에 대한 관심을 내려놓지 않았고, 은퇴 후에는 마음 속으로 그려왔던 삶의 길을 걸으며 자연인으로서 여생을 보냈다.

구 명예회장은 다양한 분야의 공익사업에 공을 들였지만, 인재를 육성하는 교육 분야에 관해서는 각별한 열의를 쏟았다. 그는 “국토가 좁고 천연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가 의존할 것은 오직 사람의 경쟁력 뿐”이라는 말을 늘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다.

부친이 1969년 설립한 LG연암문화재단의 이사장을 맡아 젊은 대학 교수들이 해외에서 견문을 넓히고 연구의 깊이를 더할 수 있도록 대학교수 해외연구 지원 사업을 펼쳤다. 구 명예회장은 재단 이사장 역임 당시 거의 빠짐없이 연암해외연구교수 증서수여식에 참석해 교수들을 일일이 격려했을 만큼 이 지원사업에 큰 애착을 가졌다.

구 명예회장은 1973년에는 학교법인인 LG연암학원을 설립하고, 낙후된 농촌의 발전을 이끌 인재 양성을 취지로 1974년 천안에 연암대학교를 설립했으며 1984년에는 우수한 기술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경남 진주에 연암공업대학을 설립했다. 특히 두 대학이 소수정예 특성화 대학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설립초기부터 전폭적인 지원과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구 명예회장은 건축가 고 김수근씨가 설계했던 자신의 서울 종로구 원서동 사저를 기증해, 1996년에 모든 문헌 자료를 디지털화한 국내 최초의 전자도서관인 LG상남도서관을 개관했다. 2006년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세계최초로 유비쿼터스 기술을 활용한 음성도서 서비스인 ‘책 읽어주는 도서관’을 구축하기도 했다.

1991년에는 소외계층에 대한 지원 사업을 체계적으로 펴고자 ‘LG복지재단’을 설립해 지방자치단체에 사회복지관과 어린이집을 건립해 기증하고, 저신장 아동에 성장호르몬제 지원, 독거노인에 생필품 지원 등 사회 곳곳의 소외이웃을 돕는 복지사업을 펼쳤다.

또 LG연암문화재단 이사장으로서 문화예술의 창작과 교류를 통한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기치 아래 2000년 LG아트센터를 건립해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데에도 힘썼다.

난 등 식물 재배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열정이 버섯으로 이어졌다. 경영인 시절의 연구개발에 대한 관심은 자연인이 되어서도 식을 줄 몰랐다.

■  재계의 모범이 되는 은퇴 경영자의 삶 실천

구자경 명예회장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철저하게 평범한 자연인으로서 살았다.

구 명예회장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면서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구인회 창업회장이 생전에 강조한 ‘한번 믿으면 모두 맡겨라’라는 말에 따라 은퇴한 이상 후진들의 영역을 확실히 지켜주는 것이었고, 어려울 때일수록 그 결심을 철저히 지켰다.

대신 그는 충남 천안시 성환에 위치한 연암대학교의 농장에 머물면서 은퇴 이후 버섯연구를 비롯해 자연과 어우러진 취미 활동에 열성을 쏟으며 하루하루 바쁜 일정을 보냈다.

구 명예회장의 취미 생활은 교직 생활 때부터 손을 댄 나무가꾸기로 시작해 난, 버섯 연구까지 자연과 벗삼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의 연속이었다. 특히 그는 무엇을 하나 시작해도 단순히 여가로 그치지 않고 전문가 수준의 식견을 갖출 때까지 파고들었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