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량'없는 근로기준에 '재량'있는 글로벌 IB 인력 떠난다
'아량'없는 근로기준에 '재량'있는 글로벌 IB 인력 떠난다
  • 어예진 기자
  • 승인 2019.07.31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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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노동부 '재량근무' 대상에 애널리스트, 펀드매니저만 포함
글로벌 IB '난감'...규제 대상 IB 인력 홍콩 등으로 보내
핵심 인력 해외에...양질의 일자리 공백
사진=어예진 기자
사진=어예진 기자

[비즈트리뷴=어예진 기자] 대형 글로벌 IB(Investment Bank)에서 M&A 업무를 맡고 있는 스페셜리스트(Specialist) A씨는 ‘딜(Deal)’이 한 번 시작되면 6개월은 올빼미가 돼 산다. 고객사가 요청한 회사의 M&A 가능성을 판단하는 데 1~2주, 자문 수임을 위한 제안서 작성에 1~2주가 꼬박 걸린다. 규모가 클 경우, 내부실사와 투자제안서 작성, 인수자 물색 등에 2~3개월을 투자한다. 추후 인수자 측에서 실사를 위해 보낸 회계법인과 법무법인 인력을 대응을 하는 데에도 1~2개월이 더 소요된다. 가격협상을 하고 거래를 성사시키는데 적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1년도 걸린다. 문제는 이런 ‘딜’을 소수의 인력이 동시 다발적으로 맡게 된다는 점이다.

◆ 재량근무에서 제외된 ‘IB업무’…글로벌 금융투자사에 불똥

31일 고용노동부가 ‘재량근로시간제 대상업무 고시 개정’을 통해 ‘금융투자분석’ 및 ‘투자자산운용’ 업무를 재량근로 대상에 추가했다. 기존에 포함되지 않았던 애널리스트와 펀드매니저들이 앞으로는 노사가 합의한 시간으로 근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과 상호 교류 해야 하는 또다른 금융전문직들은 여전히 국내 근로시간 규제에 골머리를 앓고있다.

이번 추가 적용된 근로기준 고시에는 IB 업무에 대한 기준은 포함되지 않았다. 국내에 지사를 둔 글로벌 IB의 경우 문제가 크다. 국내 증권사와 달리 적은 인원으로 주 52시간에 맞춰 근무를 하기에는 업무량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직원 수 50명 이상인 글로벌 IB 한국지사는 M&A 등 포괄적인 IB업무를 맡는 이들에 대해 내년부터 주 52시간 근로제를 준수해야 한다.

이 같은 문제로 최근 글로벌 IB 한국 대표들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해결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이들 사이에서 “국내 규정 위반으로 인한 형사처벌 등으로 회사의 명성이 손상될 가능성을 감수하면서 국내에 잔류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다”는 의견도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글로벌 IB ”주52시간 규정 위반하면서 한국에 있을 이유 없다”

실제 글로벌 IB 본사의 경우 야간고객미팅(시차반영)이나 컨퍼런스콜, 해외출장 등의 축소에 따른 국내 지점의 수익감소를 용인하지 않는 분위기다. 외국계 금융투자회사의 경우, 본사 또는 해외 계열사 등과의 협업 및 해외고객 대상 업무로 인해 야간근로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유로, 현재 국내에 있는 글로벌 IB에서는 규제를 피하기 위해 해당 실무직원들을 비롯, 파트 자체를 홍콩이나 싱가포르 등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쪽 업무를 다른 나라에 넘긴다는 의미기도 하다.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국내 금융업계가 양질의 일자리를 잃는 것은 물론, 외국사를 통해 들어오는 거래들이 대폭 줄어들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외국인의 국내투자 여건이 악화되는 부작용이 초래되는 것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바라보는 한국 금융산업 환경에 대한 매력 축소는 예정된 수순일 수밖에 없다.

A 글로벌 투자은행 한국지사에 근무하는 이 모 부장은 “외국계는 고임금 소수인력 구조인데 어쩌라는건지 모르겠다”며 “규제에 걸리니까 한국쪽 업무를 홍콩에 일부 넘기고 있다. IB 인력들을 부분적으로 보내버리는 것이다. 이러면 굳이 한국지사에서 일할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라고 불만을 토해냈다.

◆ 해외 사례 나침반 삼아 적정 기준 확립해야

우리와 비슷한 경험을 앞서 겪은 나라가 있다. 2000년대 초반 대만이 경제 호황일 당시, 수많은 글로벌 IB들이 대만에 진출해 성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기가 꺾이고 임금은 올라가고 규제가 많아지면서 글로벌 IB들이 인력 구조조정을 시행한다. 밸류에이션 분석이나 제안서 등 실무를 담당하는 스페셜리스트(Specialist)들은 홍콩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임원이나 영업하는 제너럴리스트(Generalist) 인력만 대만에 남았다. 결국은 인력 축소와 외주 증가로 인해 수많은 대만 인력들이 홍콩과 중국으로 이직하는 결과를 낳았다.

미국의 경우 ‘화이트칼라이그젬션(White color exemption)’이라는 예외 규정을 두고 있다. 관리직(Executive)과 행정직(Administrative), 전문직(Professional), 컴퓨터, 외근판매직 등 일정한 급여기준(연간 13만4004달러, 한화 약 1억5900만원)을 충족하는 경우 초과근무를 면제해주는 제도다. 미국은 금융업의 중개·자문 업무의 경우 행정직으로 해석하고 있다.

지난해 일본은 성과에 따라 급여를 지급하는 ‘고도(高度) 프로페셔널 제도’를 도입했다. 올해 4월부터는 연봉 1075만엔(한화 약 1억1690만원) 이상의 금융공학 등의 지식을 이용한 금융상품개발, 자산운용, 애널리스트, 컨설턴트, 연구개발 업무 종사자에 한해 근로시간 제한 적용 면제를 시행하고 있다.

◆ '재량근로제' 대상 포함 시급

대안으로 제시된 것 중 하나는 IB 종사자도 애널리스트와 펀드매니저 처럼 ‘재량근로제’ 대상업무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차선책으로 선택근로제의 정산기간 확대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선택근로제의 경우 현행 최대1개월에서 최대 3개월로 확대하는 법안이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다. 이같은 내용에 대해 현재 금융투자협회와 글로벌 IB 회원사 대표들이 고용노동부에 적극 의견을 개진하며 노력 중이다.

근로기준법상 재량근무 대상이 되려면 ‘전문성’ 재량의 요소가 입증돼야 한다.

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IB는 인수업무부터 M&A 중개·주선, PF자문, 주선 및 프로젝트금융, 경영참여형 사모집합투자기구 집합투자재산 운용업무 등 고도의 금융지식과 판단의 전문성을 요구한다"며 "천편일률적인 방식이 아닌 자신만의 분석과 기법, 네트워크 활용이 기본이 되는 직종으로 포괄적인 전문성이 요구되는 직종"이라고 설명했다.

대부분이 고학력 고액연봉자여서 근로시간에 준한 보수보다는 업무성과에 따른 보수가 지급되는데, 최근 국내 증권사들이 앞다퉈 IB 사업부문을 강화하는 것도 이같은 이유가 크다. 결국은 IB 부문이 금융산업의 ‘캐시카우(Cash cow)’인 것이다.

근로시간 단축제도의 도입으로 더 많은 인력이 고용될 수 있다는 논리도 IB 업무에서는 다른 나라 얘기가 된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IB 종사자들은 근로시간의 경직화로 업무의 질이 저하될 뿐더러 금융시장 발전에도 부정적인 영향 될 것”이라며 “이들 같은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업무는 추가적인 신규 인력이 대체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