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대 대통령 문재인] '노무현의 적자'에서 '통합대통령'으로 …그가 걸어온 길
[19대 대통령 문재인] '노무현의 적자'에서 '통합대통령'으로 …그가 걸어온 길
  • 승인 2017.05.10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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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그는 누구인가
▲ 문재인 제19대 대통령 당선자 l SBS 방송화면 캡쳐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고, 지금에 이르게 된 것도 마치 정해진 것처럼 느껴진다. 운명 같은 것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어 온 것 같다.”

‘노무현의 적자’로 불렸던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64)가 제19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문 당선인은 9일 서울 홍은동 자택에서 개표를 지켜보다 당선이 확실시되자 밤 11시 40분경 지지자들이 모여있는 광화문 광장에 나서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분들도 섬기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다.

그는 경선 기간 동안 줄곧 ‘나라를 나라답게 든든한 대통령’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부정부패가 없고 정의롭고 공정한 나라, 상식이 상식으로 통하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각오가 반영된 것이다.

그는 대선 과정에서 자신을 국민의 도구로 써 달라고 간청했다.

지금까지 국민을 도구로 권력을 누려왔던 특권정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적폐청산의 벽을 깨는 망치가 되고 정의로운 반석을 다지는 곡괭이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문재인은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을 바라는 온 국민의 뜻을 모아 정의로운 통합을 이루겠다”며 “정의가 눈으로 보이고 소리로 들리며 피부로 느껴지는 사회,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고 성공할 때까지 도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선포했다.

■ 노무현과의 운명적인 만남

문 당선인은 2011년 발간한 '문재인의 운명'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당신은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고 썼다.

29세의 문재인이 그의 정치 인생에서 떼놓을 수 없는 사람인 노 전 대통령과 부산에서 운명처럼 만나게 된 것은 굴곡진 우리 현대사 때문이다.

1953년 1월 경상남도 거제에서 태어나 재수 끝에 1972년 경희대 법대에 입학한 문 후보는 총학생회에서 유신반대 시위를 주도하다 구속과 동시에 제적당하고 만다.

담당 판사가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 석방됐지만 강제징집을 당해 특전사령부 제1공수 특전여단에서 군복무를 했다.

하지만 군 제대 후 곧바로 복학의 길이 막혔고 그는 전남 대흥사에서 사법고시를 공부해 1979년 1차 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부마항쟁과 10·26, 12·12 쿠데타 등 혼란 국면에서 두 번째 구속을 당했고, 유치장에서 사시 2차 합격 소식을 지금의 아내인 김정숙씨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는 고 조영해 변호사, 박원순 서울시장, 박시환 전 대법관, 송두환 전 헌법재판관, 이귀남 전 법무장관, 고승덕 변호사 등 쟁쟁한 동기들 속에서 사법연수원 차석으로 졸업했다.

▲ 참여정부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한 문재인 당선인 ㅣ 문재인후보 캠프
 

하지만 두 차례 구속 전력 때문에 판사 임용에 고배를 마시고 변호사 개업을 위해 낙향하듯 내려간 부산에서 만난 사람이 변호사 노무현이었다.

두 사람은 곧 ‘변호사 노무현·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의 동업자가 됐고, 각종 인권, 시국, 노동 사건을 맡으며 인권변호사 활동을 함께했다.

■ 정치계 입문, 참여정부 마지막 비서실장까지

1988년 노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에 당선돼 여의도에 입성했고, 문 당선인은 이후에도 부산에서 노동운동 지원 활동을 계속하다가 2002년 노 전 대통령의 대선 경선에서 부산선대본부장을 맡으며 정치계에 입문했다.

노 전 대통령의 당선 이후 문재인은 참여정부에서 민정수석, 시민사회 수석을 거쳐 ‘마지막 비서실장’을 지냈다.

민정수석 시절에는 무려 10개의 이가 빠질 정도로 과로한 탓에 1년 만에 결국 사퇴를 단행하고 히말라야로 트래킹을 떠났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귀국해 노 전 대통령의 대리인단으로 참여했다.

탄핵심판이 기각된 후에는 시민사회수석으로 청와대에 복귀했다가 다시 민정수석으로 자리를 옮겼고 참여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 3월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아 노 전 대통령과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참여정부와 함께 임기를 마친 문재인은 노 전 대통령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뇌물을 받은 의혹이 불거지자 변호인으로서 적극 방어에 나섰지만 결국 노 전 대통령은 서거했다.

당시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을 혼자서 묵묵히 감내하던 문재인의 모습은 많은 국민들에게 각인됐고 그의 정치 여정의 출발점이 됐다.

그는 ‘문재인의 운명’에서 노 전 대통령의 서거일을 “내 생애 가장 긴 하루였다. 그날만큼 내가 마지막 비서실장을 했던 게 후회된 적이 없다. 시신 확인에서부터 운명, 서거 발표, 그를 보내기 위한 회의주재까지. 나 혼자 있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했다”고 회고했다.


▲ 문재인 당선인의 특전사 시절 ㅣ 문재인후보 캠프
 
▲ 문재인 당선인의 가족 ㅣ 문재인 후보 캠프
 



■ 촛불민심과 함께 '통합의 대통령'으로

노 전 대통령 서거 후 문재인은 재단법인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직을 지냈고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총선 승리 두 달 후, 18대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한 그는 100만 국민이 참여한 민주당 국민경선에서 13번 모두 1등을 차지하며 대통령 후보가 됐다.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결국 안철수 후보, 심상정 후보와 단일화 등을 이끌어내며 명실상부한 야권 단일 후보가 됐다.

그는 18대 대선에서 야권 후보 역대 최대인 득표수 1,469만표, 득표율 48%로 선전했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3.53% 포인트 차로 패배했다.

대선 이후 당권과는 거리를 두면서도 ‘서해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공개’ ‘세월호 단식’ 등 정치 이슈의 한복판을 떠나지는 않았다.

그러다 2014년 12월 당대표 출마 선언을 하고, 이듬해인 2015년 초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로 선출됐다.

하지만 지난 대선에서 단일화했던 안철수 후보는 탈당했고 당은 2015년 4월 재보선에서 참패하면서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문재인 대세론'이 형성된 데엔 지난해 하반기에 발생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큰 역할을 했다.

박 전 대통령 탄핵 국면 속에 적폐청산을 위한 기수로 문 후보가 부각되면서 안희정 충남지사, 이재명 성남시장, 최성 고양시장과 당내 경선을 겨루어 57.0%로 전체 표수의 과반을 얻어냈다.

이에 결선투표 없이 2017년 4월 3일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최종 승리하여 더불어민주당 제 19대 대선 후보가 됐다.

대선 선거운동 기간 내내 '정권 교체', '통합'을 강조하며 각 방송사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킨 문재인은 마침내 제19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한국전쟁의 끝자락에 태어난 문 후보는 학교 기성회비를 내지 못해 수업 중 쫓겨나는 일이 과반사일 만큼 가난한 형편 속에서 공부는 게을리하지 않았고, 부산 명문학교였던 경남중에 입학하면서 차원이 다른 세상을 경험했다.

어린시절 일찌감치 겪은 양극화의 경험이 오늘날의 그를 촛불민심을 등에 업고 당당하게 청와대에 입문한 ‘광화문 대통령’으로 만든 셈이다.

[ 권안나 기자 kany872@biztribune.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