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병희컬럼] 이재용(삼성 부회장) 재판, 5.9 대통령선거와 촛불혁명 완결의 시금석...서울광장의 참뜻 살려야
[반병희컬럼] 이재용(삼성 부회장) 재판, 5.9 대통령선거와 촛불혁명 완결의 시금석...서울광장의 참뜻 살려야
  • 승인 2017.03.16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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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국정농단 세력에 대한 사면불가 방침을 공동 천명하자”
 
엊그제(13일) 더불어민주당의 소속 이재명 성남시장이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전 대표와 안희정 충남지사에게 ‘촛불혁명 완성을 위한 6대 개혁과제’를 제안하며 한 말이다.
 
유력 정치인의 공식석상 발언이라고 믿기에는 논리적 결함은 물론이고, ‘촛불’로 대변되는 ‘광장’의 의미를 퇴색시키기에 충분하다. 이시장이 변호사출신의 법률전문가라는 점에서 상실감은 더욱 크다.
 
  이시장의 인식은 대한민국 사법부의 존재이유를 무시하는 오만함에서 출발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재판을 시작하기도 전에 유력대선주자가 ‘사면불가’ 운운하는 것은 재판부에 미리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겠다는 것과 별반 다름이 없다. 재판부가 위법여부와 사실관계를 따지기에 앞서 공개적으로 이 같은 입장을 외친다는 것은 재판부로 하여금 ‘중범죄인’이라는 예단을 갖게할 수도 있다.
  
 심리과정에서 이재용 삼성전자부회장이 헌재결정문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피해자로 밝혀져 무혐의 판결을 받게 되면 실추된 이부회장의 명예를 어떻게 회복시켜 줄 것인가? 대기업 오너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고 마치 아무 일 없었던 듯 넘어갈 것인가?
 
  이시장의 정치적 캐릭터가 워낙 독특하니까 그의 발언을 걸러들은다지만, 더욱 큰 걱정은 광장, 촛불, 시민혁명의 순수한 의미가 사용자의 입맛에 따라 편의주의적 도구로 변질될 가능성이다.
 
광장은 본래 그 의미를 잃어갈 때 피를 요구했다. 연극의 1막에서 총구가 보이면 3막에서는 반드시 총성이 울리기 마련이다. 광장이 이성을 버리고 감성에 호소할 때 광장은 초인이 지배하는 공간이 된다. 늘 축제를 벌여 광장을 만족시켜야 하는 초인은 수시로 제물을 필요로 한다. 필요한 경우 윤리, 법, 질서 등의 가치는 헌신짝처럼 내팽겨 친다. 사법적 정의는 말할 것도 없고.
 
광장정치는 시민(civilian)의 열정과 순수성을 먹고 자란다. 열기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시민들은 어느새 이성보다는 감성을 강조하는 군중으로 변하며 덩어리가 커진다. 개별 시민이 아닌 군중(mob)은 그들의 집단적 이상과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항상 정치적 신화(political myth)를 갈구한다. 조작된 신화일 수록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군중속에서 구성원 개개인은 자신의 고유한 인격의 한계를 초월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엘리아스 카네티는 이때 군중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바로 ‘파괴욕’이라고 지적한다. 군중은 제가 집어삼키지 못한 인간이 단 한 명이라도 남아 있는 한 배고파한다. 여기서 군중이 파괴하려고 할 때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바로 불이다. 광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불은 멀리서도 보이고, 넘실대며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모양은 사람을 원초적으로 흥분시킨다. 사람을 끌어모은다.  

불은 전염성이 강하고 신속하며 결코 만족할 줄을 모른다. 불은 태울거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불은 난폭하다. 돌이킬 수 없는 파괴를 가져온다. 불길이 번져갈 때, 그 속성으로 시민의 집단은 군중으로 변하며, 군중은 적대적(‘공동의 적’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희생양’)이라고 낙인찍은 것들은 파괴시킨다. 파괴가 끝나면 불은 군중이 되고, 군중은 불이되어 마침내 군중은 불길처럼 사라진다. 광장도 사라진다. 모든 것이 파괴됐기 때문에...
 
역사가 보여준다. 인류는 어리석게도 광장의 참뜻을 버리고 군중의 불행을 되풀이 하고 있음을. 이른바 ‘민주주의 발전’ 또는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수식어로 장식해가며.
 
프랑스 대혁명 당시 루이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자 파리시민들은 흥분했다. 이윽고 부패와 사치의 상징이자 공동의 적인 왕비 아리 앙투아네트가 역시 단두대에 서자 그 흥분은 절정에 달했다. 광장의 촛불은 횃불이 되고 횃불은 순식간에 프랑스 전역을 시민혁명으로 불태웠다. 광장은 급기야 혁명과 반혁명이 거듭되며 4만 명이 넘는 무고한 시민의 피를 요구했다.ㅣ
 
  그런데 앙투와네트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라고 말한 적이 없고, 게다가 그녀는 파티를 즐기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빈자(貧者)들을 구제하는데 관심이 많았다. 사색을 즐기고 산책을 즐기는 사치랑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며, 특히 황실 예산의 10분의 1도 쓰지 않은 근검절약이 몸에 밴 자애로운 네 아이의 어머니였다.
 광장은 왜 진실을 그리 지독하게 왜곡하고 왕비를 희대의 조롱거리로 만들며 가학적 놀음에 푹 빠졌었을까? 광장은 그 답을 하고 있다. 그때 그 자리에 그녀가 있었기 때문이다. 허무할 정도로 담백한 답이다. 희생양으로서는 그녀보다 더없이 좋은 먹잇감을 찾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2017년 3월, 서울의 광장은 분노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축출이라는 커다란 성과를 이루어냈다. 4.19혁명, 6.10항쟁, 5.18 광주시민혁명에 이어 찬란한 시민혁명의 힘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 여기까지는 시민들이었다. 이른바 민심(public sentiment)의 승리라고도 불리워지기도 했다.
  
  대한민국에서 이 마법의 민심은 종종 두 얼굴을 갖는다. 정의를 위한 민심과 특정세력의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로서의 민심. 둘다 모두 늘 법을 초월한 하늘과 동격이다. 상식과 윤리, 통상의 사회적 가치와 질서를 뛰어 넘는다. 이를 거스르면 반역이 되고 부역자가 된다.
 
검찰과 법원도 이 민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오히려 이 민심이 넘쳐나는 광장의 불꽃 속으로 스스로 빠져 들어간다. 군중의 열화와 같은 환호를 받으며. 검찰의 득의양양한 얼굴과 법관들의 웃음띤 얼굴은 광장의 영웅이 된다. 기방의 기녀로 전락한 대한민국의 언론은 낯뜨거운 찬가를 쏟아내며 이들 권력기관의 칭송에 목이 마르다. 저널리즘으로서의 본질을 버린지 오래다.
 
이번에도 그런 조짐이 보인다. 세상에나. 특검은 그렇다 치고, 세계적 글로벌 기업의 총수(이재용 부회장)에게 도주우려가 있다며 영장을 발부한 법원, 시민이 아닌 군중의 영웅이 되기에 충분하다. 내심 이를 기대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재명시장이 불이 꺼져 가는 광장의 군중에 다시 불씨를 붙이려는 듯 ‘사면불가’를 외친다. 정식 재판도 시작되기 전에. 프랑스대혁명 대혁명 당시 광장과 군중이 잠시 오버랩되는 것은 지나친 기우일까.
 
촛불이, 시민이, 서울(광화문)의 광장의 참뜻이 훼손되지 않았으면 한다. 광장은 위대했다. 시민도 위대했다. 군중으로 변질되지 않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쫒겨나 검찰의 본격 수사를 받게 되고 5월9일 대통령선거일로 정한 사실이 이를 웅변한다.
 
검찰과 법원은 이런 광장의 의미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군중의 일시적 영웅이 돼 광장을 불태워 버릴 것인지, 영원한 시민혁명의 수호자가 될 것인지는 재판부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 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에서 절대권력(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의 협박에 의한 사실상의 피해자로 드러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재판은 그 시금석이 될 것이다.
 
[반병희 비즈트리뷴 대표 bbhe424@biztribu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