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병희컬럼] 이재용과 탄핵, 법치(法治)가 아닌 법치(法恥)의 희생양이 돼서는 안된다
[반병희컬럼] 이재용과 탄핵, 법치(法治)가 아닌 법치(法恥)의 희생양이 돼서는 안된다
  • 반병희 고문
  • 승인 2017.03.12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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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병희 대표
  ‘법치주의’가 화두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인용되자 법치주의의 승리라는 찬사가 여기저기서 쏟아진다. 광화문광장의 촛불이 스러져가는 법치주의를 살렸다고 감격해 한다. 법치주의의 지고지순한 가치를 직접 실천하고 보여줬다는 자부심이 시민들의 얼굴에 가득하다. 그럴만하다. 헌법재판소의 간결하고도 명쾌한 주문서는 결론만큼이나 그 내용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엊그제 재판을 시작한 이재용삼성전자부회장에 이르면 사정은 달라진다. ‘법앞에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딘가 뒷끝이 개운치 않다. 말은 맞는 것 같은데 자세히 속을 뜯어보면 이 부회장에 한해서만은 이 명제가 비껴 나가는 듯 하다. 심지어 ‘깔금한’ 헌법재판소와 ‘뭔가 복잡한’ 특검이라는 이미지가 오버랩된다.

 2017년 3월 대한민국에서 과연 법치(法治)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근대적 의미의 법치주의는 국민의 천부적 기본권과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비롯됐다. 절대군주의 말 한마디가 곧 법인 강압적 통치체제에서는 생명권을 포함한 국민의 모든 기본권이 무시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지나치게 강하면 부러지는 법. 인간의 존엄성에 눈을 띄기 시작한 민초(사실상 귀족)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자신들의 권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마그나카르타(대헌장·大憲章) 이래 권리장전을 거쳐 미국독립전쟁(버지니아 권리장전)과 프랑스대혁명(프랑스 인권선언)에 이르기 까지 절대권력에 맞선 수백년간의 피의 투쟁은 처절했다. 그래도 결실은 달콤했다. 이 긴 여정은 마침내 법치주의(法治主義)라는 정치원리로 승화됐고 인간은 비로소 신의 영역이 아닌 인간 스스로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영위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

그렇지만 법치주의는 보기 좋게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기 다반사였다. 법치라는 이름 아래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짓밟았고, 정치권력(때로는 광장의 권력)과의 야합을 통해 감성적 도구로 전락하며 절대왕정시절 보다 못한 인권 유린을 자행했다.
 
법치주의의 생명인 이성과 합리, 과학적 절차는 수시로 내팽겨 쳤고, 특정 정치적 사회적 목적은 국민의 기본권을 대의를 위해 언제든 희생시킬 수 있는 뒷방의 광주리쯤으로 치부했다.
 
자유민주주의 역사가 짧은 나라일수록 이런 현상은 심했다. 법치주의는 민주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근간이 아니라 오히려 형식적 논리로 무장, 민주주의 심장에 비수를 들여다 대기도 했다.
 
외부에 의한 일제강점 종식으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이란 선물을 얼떨결에 갖게 된 대한민국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한국 현대사는 그 자체가 이런 갈등의 연속이라 할 수있다. 독재권력이 됐든, 광장의 권력이 됐든간에.

여기에는 이성적 판단과 합리적 과학적 사고보다는 정치적 신념이 앞서는 법기술자들의 조연이 빛을 발휘했다. 판사, 검사, 변호사, 교수라는 각각의 얼굴을 한 법기술자들은 입맛에 맞는 언론을 술집 작부(酌婦) 삼아 마음껏 유희를 즐겼다.
 
이재용 부회장의 사례는 법기술자들의 예술성(?)이 어느 경지까지 이를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9일 막이 오른 '비선 실세' 최순실(61)씨 측에 400억 원 대의 뇌물을 주거나 제공하기로 약속한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부회장에 대한 공판준비 법정은 시작부터 ‘한국에서 과연 법치주의가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고 있다.
 
기소단계에서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인용을 위한 짜 맞추기식 정치적 수사라는 지적을 받았던 만큼 재판은 일찍이 많은 논란을 예고했다. 지배권 승계 등을 위해 박 전 대통령에게 부정청탁을 했다는 특검의 가설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일각의 주장은 둘째 치고, 공소장이 위법하다는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잇따르고 있다. 공소장 자체가 효력을 갖지 못한다는 설명이다.

이를 지켜보고 있는 제3의 시각으로서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실제 이 부회장 변호인단에 따르면 특검 측은 과거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과 미래전략실을 '삼성그룹 대주주 일가를 대변하고 대관업무 창구 역할을 한다'고 적시하는 등 이번 사건의 공소사실과 무관한 내용까지 공소장에 포함시키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특검이 증거조사 절차 없이 수사과정에서 압수된 내부 서류, 문자메시지, 이메일 등을 전체 중 일부를 잘라서 제시했다는 변호인 측의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사실이라면 재판부로 하여금 예단을 갖게 하려는 특검의 작위적 의도로 밖에 볼 수 없다. 목표와 목적을 미리 정해 놓고 재판부를 이에 맞춰 요리하겠다는 취지인 셈이다. 그저 사실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수사과정에서도 여러 대목에서 무리수가 엿보인다.
 
삼성 임직원 60명을 소환할 때 탄핵사건의 당사자인 박 전 대통령은 이런 저런 이유로 단 한차례도 직접 조사를 한 적이 없다. 또 다른 핵심관계자인 우병우 전 민정수석도 특검해체 직전에야 한 차례 소환하는 등 협박당한 삼성이 되레 국정농단의 몸통으로 둔갑하는 기괴한(?)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특검이 아니라 ‘삼성 특검’으로 변질된 것은 실패한 수사라는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 손쉽게 수사할 수 있는 기업만 잡아 족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10만쪽 분량의 수사 자료 중에서 삼성 관련 내용이 3만쪽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쯤되면 헌법재판소의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인용과 이 부회장에 대한 특검의 수사는 완전히 구분해야 한다는 지적을 외면하기 어렵다.
 
법치주의란 법에 따라 지배해야 한다는 뜻이다. 권력이 그 권한을 마음대로 휘두르지 않도록 법으로 제한한다는 점에서 이는 대단히 중요한 원칙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것이 담고 있는 내용과 이를 적용하는 과정이 정의롭고 올발라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법이 정당한 내용을 담고 있고, 법을 적용하는 과정이 공정하기 위해서는 검찰과 법원의 역할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두 수레바퀴 중 한쪽인 검찰의 법적용 과정에 조금이라도 의구심이 든다면  마지막 보루인 법원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법원의 공정한 심판과 판결에 쏠리는 국민들의 눈은 늘 진지하고 무거운 법이다.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재판도 마찬가지다. 재벌이라고 차별이 주어져서는 안되는 이유다. 법치주의는 형식적 과정 뿐만 아니라 실질적 내용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비즈트리뷴 반병희 대표 bbhe424@biztribune.co.kr]